오고 가며 결재-회의 '모바일 오피스' 재택근무 新바람

  • 입력 2001년 8월 19일 18시 42분


한국휴렛팩커드 컨설팅 사업본부에서 근무하는 김기열씨(32)의 직급은 어엿한 ‘과장’. 하지만 ‘휘하’에 소속된 부하 직원은커녕 자기 책상조차 없다. 김씨의 하루 일과는 아침에 집에서 노트북으로 회사 서버에 접속, 메일을 체크하거나 간단한 온라인 미팅을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는 컨설팅 의뢰를 받은 고객회사로 곧바로 ‘출근’한다. 무선 인터넷으로 회사와 접속한 뒤 관련된 자료를 주고받거나 모든 업무 결과를 보고하고 일을 마치면 바로 집으로 퇴근해 남은 잡무를 처리한다.

“처음엔 내 자리가 없다는 사실에 불안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어 효율적이라고 생각됩니다. 고객들과 함께 하는 시간도 늘어나 회사와 고객 모두 만족해 하고요.”

무선 인터넷 장비 이용…기동성-효율성 탁월

▽‘접속〓출근’〓집과 거래처만을 오가며 무선통신장비를 이용해 업무를 처리하는 신개념의 ‘재택근무’가 새로운 사무실 풍속도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모바일 오피스(mobile office)’라고도 불리는 새로운 ‘재택근무’는 사무실 풍경뿐만 아니라 기존의 조직 질서와 기업 문화까지 바꿔 놓고 있다.

정보기술(IT)기업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재택근무제는 무선 인터넷 등 발달된 네트워크 인프라를 최대한 활용한다. 기업에선 직원들에게 사무실과 책상 대신 노트북과 휴대전화, 호출기만 지급한다. 이들 장비만 있으면 어느 곳에 있건 앉아 있는 곳이 곧 사무실이 돼 결재와 보고 등 모든 회사 업무를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동성과 효율성 등에서 사무실의 ‘붙박이’들을 월등히 앞서는 것은 당연한 결과.

한국휴렛팩커드의 경우 전체 1200여명의 직원 가운데 800여명이 이같은 형태의 근무 형태를 취하고 있다. 김과장이 소속된 컨설팅 사업본부는 주인없는 50여개의 책상이 놓여져 있는 1개층만을 사용하는데도 별다른 불편이 없다. 이 회사처럼 새로운 개념의 재택근무제를 도입한 회사들은 한국IBM 등 외국계 IT회사들. 350여명의 직원이 근무하는 썬마이크로시스템즈는 50여명의 관리 직원들을 제외한 300여명이 사무실과 책상이 없다. 이 제도의 효율성이 널리 알려지면서 삼성전자와 LG-EDS 등 국내 IT기업들도 앞 다투어‘탈사무실’의 대열에 동참하고 있다.

IT기업들 "너도 나도"…철저한 자기관리 필요

▽득실과 달라진 조직문화〓95년 초부터 ‘모바일화’를 추진한 한국 IBM의 관계자는 “2000여명의 직원 가운데 1200여명이 재택근무를 하면서 업무 공간을 3분의1로 축소했다”며 “100억원의 유지비를 절감한 것은 부수적인 소득”이라고 밝혔다.

한국IBM 저장장치사업본부 사원 이우용씨(30)는 “재택근무가 어떤 의미에서는 매일 회사에 나오는 것보다 더 타이트하다”고 말한다.

회사에서 떨어져 있는 만큼 얼굴을 못 보는 대신 업무의 결과물에 대한 평가는 냉혹하기 때문에 자기 관리면에서 더욱 철저해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물론 시간관리를 잘하면 나만의 시간을 내 자기 개발에 시간을 투자할 수도 있다는 것이 이씨의 설명이다.

직장 동료간의 유대감 상실은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하는 대가.

국내 대기업에서 지난해 한국휴렛팩커드로 직장을 옮긴 유리라씨(31)는 “‘사수’가 정해져 신입사원을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주던 전 직장과 달리 이 곳에선 같은 부서 동료가 결혼을 해도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미국에서는 재택근무가 이미 보편적인 근무 환경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최근 미국 노동자의 12%에 해당하는 1650만명 정도가 한 달에 하루 이상 재택근무를 한다고 보도했다. 재택근무가 보편화되면서 이들을 위한 근무 공간인 ‘호텔링 센터’나 ‘드롭인(Drop-in) 센터’도 대도시마다 크게 늘어나고 있다.

<박윤철기자>yc97@donga.com

◆ 24시간 활용 '비즈니스 센터'인기-첨단 인프라 완비…자문단도 운영

재택근무(Telework)의 어려움 중 하나는 통신 시설 등 고가의 업무 인프라를 갖추기 어렵다는 것. 최근 국내에서도 이런 점을 감안해 서류 뭉치나 노트북 컴퓨터만 들고 가면 업무를 볼 수 있는 비즈니스센터가 각광을 받고 있다.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르호봇(www.ibusiness.co.kr)’은 일반 오피스텔과는 달리 한달 단위로 사무실을 임대해 쓸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의 재택 근무 장소다. 인터넷 전용선은 물론 복사기 스캐너 팩스 등 사무자동화 기기와 빔 프로젝터를 갖춘 회의실 등 업무에 관련된 인프라가 고루 갖춰져 있어 개인창업자와 재택근무자에게 인기가 높다. 이미 24개 ‘초미니’ 업체 60여명의 직원이 입주해 있다.

벤처기업의 영업을 대행해주는 김영덕씨(42)는 “업무 효율을 생각했을 때 가정과 업무 공간을 분리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 3개월째 이용하고 있다”며 “사무실 임대료와 전화비만 내면 24시간 마음껏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르호봇의 또 다른 특징은 교수 변호사 회계사 등으로 구성된 경영자문단과 개인창업자 재택근무자를 연결시켜 준다는 것. 또 서류작성 우편물 수령 등 비서 업무와 통역 번역 아웃소싱 서비스를 제공해준다. 업계에 따르면 르호봇과 비슷한 형태의 비즈니스센터는 외환 위기 이후 서울에만 10여개가 생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즈니스센터는 미국에서 이미 수년전부터 ‘호텔링센터’ ‘드롭인(Drop-in)센터’ 등의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재택근무 장소다. 미국의 증권사 찰스슈왑 등은 사무실 임대료가 싼 시 외곽에 재택근무자를 위한 비즈니스센터를 마련, 직원들이 굳이 본사로 출근하지 않아도 업무를 볼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차지완기자>maruduk@donga.com

◇ '모바일 오피스제'를 도입한 한국 IBM의 자체평가

1.시설

사무실 5개층을 LAN환경이 구축된 160석 규모의 모바일 전용 사무실로 개조. 강남과 강북에 20∼30석의 비즈니스센터 개설.

도입 후〓3명이 1개의 업무공간을 사용하면서 5년간 100억원의 경비를 절감.

2.장비

노트북컴퓨터 휴대전화 호출기 등 지급, 원격 업무처리 가능한 네트워크인프라 구축. 모든 직원에게 음성사서함 지급.

도입 후〓시행 초기엔 음성사서함의 메시지 활용도가 낮아 어려웠으나 곧 직원과 고객들이 적응하면서 고객만족도가 오히려 상승.

3.업무

행정, 교육, 인사 등 모든 업무를 모바일 환경에 맞춰 개조. 195개에 달하는 결재양식을 95개로 축소하고 56개 양식은 온라인 네트워크로 결재가 가능하도록 개조.

도입 후〓경비처리 신청, 재직증명서, 타임카드 등 핵심적인 결재 업무 대부분이 전자화.

4.인사

정시 출퇴근제를 없애고 대신 현지 출퇴근제를 자율적으로 운용. 회사에는 1, 2주에 한번 꼴로 출근하도록 조정.

도입 후〓초기에는 소속감과 일체감이 떨어지는 현상 발생. 이를 보완하기 위해 분기마다 전직원이 참석해 한차례씩 회식자리 마련하고 부서별로 비공식적인 회합 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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