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의 신비 밝혀줄 설계도 최초 완성

  • 입력 2000년 8월 9일 18시 33분


순백의 깨끗함 때문에 ‘순결’이란 꽃말과 가장 잘 어울리는 백합. 그래서 연인에게 변치 않는 사랑을 맹세할 때 선물하는 꽃은 단연 백합이다. 그런데 꽃잎의 수가 몇배 많아진 ‘풍성한’ 백합 한송이는 어떤 느낌을 줄까? 6갈래 꽃잎을 지닌 자연산보다 더욱 아름다울 것이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1990년대 초부터 꽃잎의 수를 대폭 늘이는 실험이 본격화됐다(사진 참조). 화제의 주인공은 십자화과에 속하는 애기장대. 십자(十字) 모양의 네 꽃잎이 수십여장으로 늘어난 모습이다.

비밀은 애기장대에서 꽃 유전자를 찾아내 변형시킨데 있다. 꽃은 바깥쪽부터 꽃받침, 꽃잎, 수술, 암술의 4 기관으로 구성된다. 이들을 만드는 유전자는 A, B, C 3종류뿐이다. 이 가운데 어느 한두가지의 기능을 없애면 다양한 기형 꽃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수술 형성에 관여하는 유전자 B와 C에 화학처리를 가해 기능을 상실시키면 수술이 자랄 자리에 꽃잎이 무성하게 피어난다.

애기장대가 속한 쌍떡잎식물의 경우 꽃을 피우는 메커니즘이 거의 동일하다. 애기장대의 유전정보만 완벽히 밝혀내면 쌍떡잎식물의 개화에 얽힌 비밀을 알아낼 수 있다는 의미다.

과학자들은 인간게놈프로젝트의 출범 시기인 1990년대 초부터 애기장대에 매달렸다. 무엇보다 유전정보 전체(게놈)의 양이 적다는 점이 매력이었다.

유전정보가 이중나선의 DNA에 담겨있고, DNA는 아데닌(A), 티민(T), 시토신(C), 구아닌(G) 4종류의 염기로 이뤄진다는 점은 인간이나 식물이나 마찬가지. 지난 6월 말 초안이 완성된 인간게놈프로젝트는 30억개의 인간 염기가 어떤 서열로 구성됐는지를 밝힌 작업이었다. 이에 비해 애기장대 DNA의 염기수는 불과 1억2000만개. 이 가운데 특정 기능을 발휘하는 단백질을 만들어내는 유전자(gene)의 수는 2만5000개(인간은 10만개) 정도다.

최근 과학전문지 ‘사이언스’는 조만간 애기장대의 염기서열이 공개된다고 밝혔다. 세계 최초로 식물게놈프로젝트가 완료된다는 의미다.

하지만 염기서열은 그저 알파벳 1억2000만개를 나열한 데이터일 뿐이다. 그동안 애기장대의 게놈 연구를 지원해온 미국 국립과학재단(NSF)은 2010년까지 애기장대의 유전자 2만5000개의 정체를 밝힌다는 목표로 ‘2010 프로젝트’를 새롭게 추진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왜 식물게놈프로젝트에 매달리는 것일까. 단지 아름다운 백합이나 장미를 만드는 것이 목표일까.

실제로 꽃잎이 12갈래 정도 달린 백합을 만들 계획인 이일하교수(서울대 생명과학부)는 “애기장대의 유전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이를 다른 꽃에 적용하면 막대한 부가가치를 얻을 수 있다”라고 말하고 “식물게놈연구의 응용가능성에 주목하라”고 강조한다.

봄배추의 경우 수확하는 시기에 꽃이 피면 이상하게 배추맛이 떨어져 30% 정도는 내다버린다. 그렇다면 애기장대에서 꽃이 아예 피지 않도록 유전자의 기능을 억제하는 메커니즘을 찾아내고, 이를 배추 유전자에 적용하면 간단하게 문제가 해결된다.

식물게놈프로젝트의 연구대상은 단지 애기장대에 그치지 않는다. 쌍떡잎식물의 대표 모델이 애기장대라면, 각종 곡류를 포함하는 외떡잎식물의 ‘간판’은 벼다. 1998년 한국을 포함한 10개국 정부가 구성한 벼게놈국제공동연구(IRGSP)와 함께 미국의 몬산토사가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고 있다. 벼 유전자 4만여개의 기능이 모두 밝혀지면 같은 외떡잎식물에 속하는 옥수수, 보리, 밀과 같은 다양한 곡류의 유전정보가 손쉽게 얻어질 수 있다.

1970년대 녹색혁명을 주도했던 통일벼의 사례를 살펴보자. 통일벼는 보통 벼에 비해 줄기 성장이 더뎌 바람에 영향을 받지 않은 탓에 튼튼하게 잘 자랄 수 있었다. 물론 자연발생적으로 얻어진 돌연변이체였다.

그런데 최근 통일벼의 키가 왜 작았는지에 대한 유전적 원인이 밝혀지고 있다. 줄기를 성장시키는 호르몬과 결합해 반응을 일으키는 요소(수용체)가 결핍된 것. 보통 벼를 비롯한 옥수수, 보리, 밀에 비슷한 돌연변이를 일으킨다면 현재보다 몇배 튼튼한 곡물을 만들 수 있다.

식물게놈연구는 약용 분야에서도 활용 가능성이 높다. 현재 과학기술부가 21세기 프론티어사업의 일환으로 추진중인 자생식물다양성사업계획에는 한국 고유의 약용작물인 인삼과 오가피의 게놈연구가 주요 항목으로 선정돼 있다. 최도일 박사(생명공학연구소 식물세포공학실)는 “인삼과 오가피에서 약용 유전자를 찾는 사업이 올해 말부터 진행될 예정”이라고 말한다. 신비의 영약이 지닌 비밀이 유전자 수준에서 밝혀질 날이 멀지 않았다.

<김훈기과학동아기자>wolf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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