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스탠더드시대 ①]「한국식표준」재정립 기회삼아야

  • 입력 1998년 3월 31일 19시 53분


《경제 문화 법률 등 각 부문에서 국경이 사라지고 있다. ‘세계에 통용되는 하나의 기준’이 등장하기 때문. 글로벌 스탠더드(Global Standard)의 확산 과정이다. 특히 한국엔 글로벌 스탠더드를 주도하는 미국 등으로부터 ‘로컬 스탠더드’를 폐기하라는 요구가 거세다. 한국식 제도와 규칙을 버리고 세계표준을 따르라는 압력이다. 대개편은 이미 시작됐다. 그 현장을 점검해보고 한국적 표준이 글로벌 스탠더드와 어울릴 수 있는지 부문별로 진단해본다. 매주 수, 금요일 두차례 시리즈로 엮는다.》

77년 일본 소니사는 경쟁사인 마쓰시타로부터 ‘VCR를 공동개발하자’는 요청을 과감하게 뿌리쳤다.그러고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성능을 갖춘 베타맥스방식의 VCR를 독자 개발했다. 소니는 이 VCR의 성능을 과신한 나머지 히타치와 미국 RCA사가 자기네 상표를 붙여 납품해달라는 요청도 거절했다.

마쓰시타는 기술적으로 뒤진 VHS방식의 VCR를 내놓고 히타치와 RCA사를 같은 방식의 VCR생산에 끌어들였다. 상황은 소니에 불리하게 흘러갔다. 시장 지배력이 큰 나머지 업체들이 줄줄이 VHS방식을 채택, VCR ‘세계표준’으로 위치를 굳힌 것. 소비자들이 베타맥스 VCR에서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기술우위도 중요하지만 세계표준이 되느냐의 여부가 훨씬 더 충격적이란 교훈을 전해준 사례.

오늘의 한국도 ‘소니의 좌절’을 겪고 있다. 핵심 경제부처인 재정경제부에는 국제통화기금(IMF)한국사무소 현판이 내걸렸다. IMF는 한국의 국가부도를 막아줄 급전을 빌려주고는 한국 경제구조 등을 대대적으로 뜯어고치라고 요구하고 있다. 부도위기를 초래한 경제부처는 물론 한국은행 재벌그룹들까지 사실상 IMF의 ‘시찰’대상이 돼버렸다.

IMF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기업지배구조 개편, 금융 및 제조업의 구조조정, 회계제도 개선 등. 바로 서구식 가치와 경제질서다. IMF의 한국 입성(入城)은 ‘표준규격’전쟁 영역이 기술분야만이 아니라 경제 사회 법체계는 물론 관습의 영역에까지 확대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미국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이란 저서에서 “냉전이 자본주의의 승리로 끝나면 서구자본주의에 도전하는 세력은 이슬람권이 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정작 서구에 도전한 세력은 80,90년대 고도성장을 바탕으로 급속하게 결속한 아시아권. 유교적 가치와 국가주도형 성장전략을 내세운 아시아경제는 서구식 표준에서 보면 ‘미완(未完)의 대륙’이었다. 아시아권은 서구의 표준에 취약하기만 했고 갑자기 닥친 경제위기에 몸을 떨었다. 한상춘(韓相春)대우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일본 한국 동남아경제의 위기는 아시아적 표준이 서구 표준에 밀린 결과”라면서 “아시아에 ‘글로벌 스탠더드’가 침식해 들어오고 있음을 알리는 사건”이라고 풀이했다.

4년 전인 94년 봄 한국. 국회의원과 농민들은 제네바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때 ‘쌀시장 개방 결사반대’를 외쳤다. 삭발을 하고 혈서도 썼다. 그 즈음 미국은 유럽연합(EU)측과 쌀을 포함한 무역분야 세계표준(세계무역기구 창설)에 이미 합의하고 서비스분야의 세계표준 제정을 서두르고 있었다.

몇달 뒤인 그해 5월 세상에 모습을 보인 것은 ‘금융서비스와 통신시장 개방협상’이었다. 쌀시장 개방에 민감했던 한국은 쌀보다 훨씬 파급효과가 큰 새로운 세계표준에 대비하지 못했다. 한국은 결국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입과 자본시장 개방을 맞바꿔야 했다.

80년대 미국은 일본경제에 밀려 헤어나기 어려운 무역적자에 시달리고 있었다. 미 행정부는 이 위기를 산업구조조정, 구체적으로는 최강의 서비스산업을 키우는 것으로 극복했다. 그러나 서비스분야가 아무리 강해도 외국에 팔지 못하면 국제수지 적자해소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 미국은 곧 외국 서비스시장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는 국제경제기구 등을 통해 외국 경제체제를 미국식으로 바꾸려는 시도로 나타났다. 이런 시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일본의 한 경제연구소 분석에 따르면 미국 국내법의 55%는 이미 국제규범화됐다.

글로벌 스탠더드는 이미 우리 머리 위에 와있다. 우리 경제 사회생활에 막강한 영향력을 드러내보이고 있다. 97년 2월 정부와 여당, 그리고 재계가 한마음이 돼 밀어붙였던 정리해고법안은 노동계와 국민의 반발로 유보됐다. 그러나 1백만명 이상의 해고자를 양산할 이 법안은 불과 1년만에 IMF체제에서 간단히 통과됐다.

재무구조가 비교적 건전한 것으로 알려진 LG그룹도 지난달 방문한 IMF관계자들로부터 “계열사 50여개가 말이 되느냐”는 면박을 당했다.총수아들이운영하는 관계사를 편법으로 지원했던 SK텔레콤은 최근 소액주주의 반발이 거세지자 지원액 만큼의 주식을 돌려받았다. 몇달 전까지만 해도 생각하기 어려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전경련 등 경제단체에는 한국식 기업지배구조 회계기준 금융구조 등을 수술대에 올려달라는 외국자본의 요구가 쏟아지고 있다. 국민의 배외(排外)감정 등 의식구조까지도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김&장 법률사무소의 신재현(申載賢)변호사는 “한 나라의 법체계는 외풍을 가장 덜 타는 분야였지만 요즘엔 회사법 등도 서구기업의 입맛에 맞게 손질되는 추세”라고 털어놨다. 전경련 관계자는 “월드컵 전용구장을 국제축구협회 규격에 맞게 지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라고 표현했다.

이같은 세계표준을 우리는 거부할 수 있을까. 불행하게도 이미 우리의 선택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진단이다. 문제는 이를 적극 수용하더라도 수천년 이어내려온 한민족의 가치체계와 마찰을 일으키거나 거부반응을 보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 경제전문가들은 따라서 “한국식 표준을 새롭게 정립하는 ‘수단’으로 세계표준을 활용하자”는 제안을 내놓고 있다.

“양궁은 서양에서 만든 스포츠다. 우리가 금메달을 휩쓰니까 룰을 여러번 바꿨다. 그러나 우리는 바뀐 룰에 금세 적응해 또 금메달을 따오지 않는가. 글로벌 스탠더드도 마찬가지다. 잘 익혀 유리하게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박래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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