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재 교수의 지도 읽어주는 여자]세계인의 마음 훔친 청순미 화신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9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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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잉그리드 버그먼의 도전

김이재 지리학자·경인교대 교수
김이재 지리학자·경인교대 교수
스웨덴 배우 잉그리드 버그먼(1915∼1982)은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사진작가 아버지의 사랑 속에 컸다. 12세 때 아버지마저 잃었지만 씩씩하게 자랐다. 스톡홀름 왕립드라마학교에 입학해 영화배우로 데뷔한 그는 인구가 적은 북유럽의 한계를 넘기 위해 어머니의 고국인 독일에 진출한다. 베를린에서 찍은 ‘인터메조’(1936년)가 주목받자 치과의사 남편과 할리우드로 간다.

19, 20세기 북유럽인들은 더 나은 삶을 찾아 북미 5대호 연안으로 대거 이주했다. 시카고는 스톡홀름 다음으로 스웨덴인이 많이 사는 도시였다. 영어 공부에 매진한 푸른 눈의 금발 미녀는 ‘카사블랑카’(1942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3년)에서 열연해 세계인의 마음을 훔쳤다. ‘성모 마리아의 종’(1945년), ‘잔 다르크’(1948년) 등에 출연했고 ‘가스등’(1946년)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는다.

솔직하고 지적이며 일에 대한 열정도 뜨거웠던 그는 승승장구했지만 거대한 공장처럼 돌아가는 할리우드에 지쳐 갔다. 극사실주의 영화 ‘무방비도시’에 반한 그는 이탈리아의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에게 영화를 찍고 싶다는 편지를 썼다. 이탈리아 남부의 화산섬에서 ‘스트롬볼리’(1950년)를 촬영했지만 여성에 대한 편견이 강한 이탈리아에서 그는 고전했다. 현지 어부를 섭외해 즉흥적으로 영화를 찍는 로셀리니의 연출 방식도 버거웠다. 각자 가정이 있었던 두 사람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자 비난이 쏟아졌고, 둘의 새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스캔들을 딛고 런던에서 촬영한 ‘아나스타샤’(1956년)에서 그는 더 깊어진 연기로 두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는다. 웨일스에서 자녀들과 추억을 쌓았고 옥스퍼드 인근 길퍼드 극장에서 선보인 연극은 여왕이 관람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20세기 초 여성 참정권 운동이 불타올랐던 영국은 그에게 행운의 나라였다.

글로벌 배우로 우뚝 선 그는 1958년 스웨덴 제작자와 세 번째 결혼을 한다. 매년 여름 스웨덴 서부 섬의 별장에서 가족과 휴가를 즐기며 미소를 되찾았다. 네 자녀의 사진과 동영상을 촬영한 엄마의 자상함은 영화 ‘그녀, 잉그리드 버그먼’(2015년)에 고스란히 담겼다. 영화배우가 된 딸 이사벨라가 10대 때 척추측만증 진단을 받자 2년간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간호할 정도로 자식 사랑이 극진했다.

9년에 걸친 암 투병 중에도 연기 열정은 식지 않았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1974년)으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았고, 스웨덴 감독 잉마르 베리만과 ‘가을 소나타’(1978년)를 찍었다. 아픈 몸으로 이스라엘 전역을 다니며 철저히 준비해 이스라엘 첫 여성 총리의 삶을 완벽하게 재현한 ‘골다라고 불린 여인’(1982년)은 유작이 됐다. 1982년 67번째 생일(8월 29일)에 숨을 거둔 그의 장례식은 런던에서 엄수됐다. 그의 재는 부모가 묻힌 스톡홀름과 그가 좋아했던 스웨덴 단홀멘 앞바다에 뿌려졌다.

김이재 지리학자·경인교대 교수
#잉그리드 버그만#카사블랑카#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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