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국은 본디 왕실의 의료행위를 담당하는 내의원(內醫院)의 별칭이다. 약국 주인은 봉사(奉事)라고 불렀다. 원래는 내의원의 관직명인데 약국 주인의 호칭으로 쓰였다. 조선 후기에는 민간 약국이 번창했다. 서울 구리개(현재 을지로)에는 약국이 밀집해 약국거리를 형성했다. ‘신농유업(神農遺業)’ ‘만병회춘(萬病回春)’ 등의 간판을 걸고 영업했다.
약재 유통 환경은 이처럼 발전을 거듭했지만 약재를 공급하는 사람은 여전히 호미를 들고 광주리를 짊어진 약초꾼이었다. 이들은 범을 만날 위험을 무릅쓰고 약초를 찾아 깊은 산속을 헤맸다. 19세기 서울의 남씨 노인은 약초를 캐고 버섯을 팔아 늙은 형수를 봉양했다. 형수는 일찍 죽은 부모 대신 그를 길러줬다. 형수가 세상을 떠나자 남씨는 삼년상에 준하여 상을 치르고, 제사 때마다 형수가 생전에 즐기던 생선 알을 올렸다. ‘추재기이’에 나오는 이야기다. 거대한 의료체계를 지탱한 것은 남씨와 같은 이름 없는 약초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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