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훈의 호모부커스]<89>출판사 이름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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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 1만 종 가까운 책을 펴내는 세계적인 출판그룹 하퍼콜린스의 시작은 1817년 제임스 하퍼, 존 하퍼 형제가 세운 제이앤드제이하퍼다. 1837년 하퍼앤드브러더스로 이름을 바꿨고 1962년 로·피터슨앤드컴퍼니와 합병하여 하퍼앤드로가 되었다. 미디어그룹 뉴스코퍼레이션이 이를 인수하여 1990년대 윌리엄 콜린스 선스와 합병시킴으로써 하퍼콜린스가 탄생했다. 미국의 하퍼 가문과 영국의 콜린스 가문이 이름에 남았다.

F 스콧 피츠제럴드, 어니스트 헤밍웨이, 커트 보니것 등 미국 주요 작가들의 작품을 많이 펴낸 찰스 스크라이브너스 선스. 1846년 창업 땐 공동 창업자 찰스 스크라이브너와 아이작 베이커의 성을 딴 베이커앤드스크라이브너였다. 베이커의 지분을 사들인 스크라이브너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아들 세 명이 공동 경영하면서 ‘찰스 스크라이브너의 아들들’이 되었다. 서양에는 이렇게 창업자나 발행인 성을 딴 출판사 이름이 많다.

1945년 건국공론사로 출발한 현암사는 1951년부터 현암사라는 이름을 썼다. 현암(玄岩)은 시인 박목월이 창업자 조상원에게 지어준 아호다. 1946년 ‘건국공론’ 제3호에 박목월의 시 ‘나그네’(당시 제목 ‘남도 삼백리’)가 발표되는 등 두 사람은 친분이 깊었다. 1913년 고서점으로 시작한 일본 출판사 이와나미쇼텐(巖波書店)은 창업자 이와나미 시게오의 성을 따랐다. 이렇게 성이나 아호를 내건다는 것은 부끄럽지 않게 책임을 다하겠다는 결의 그 자체다.

1908년 최남선이 세운 신문관(新文館)은 새로운 문화로 사람들을 일깨운다는 계몽적 의미를 담았다. 1945년 을유년에 창립된 을유문화사는 광복을 기리면서 ‘출판보국’의 사명감을 나타낸 이름이다. 1966년 설립된 민음사는 백성의 소리(民音), 곧 ‘세상의 낮은 목소리를 우아하고 품위 있게 담자’는 뜻으로 지었다. 2011년에 첫 책을 낸 출판사 어크로스는 다양한 분야를 ‘가로지르는(across)’ 책을 내고 싶은 소망을 담았다.

푸른역사 푸른숲 푸른솔 푸른사상 푸른지식 푸른나무 푸른책들 푸른길 푸른영토 푸른육아 등등. 출판사 이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색깔은 맑은 가을 하늘이나 깊은 바다, 솔이나 풀의 빛깔과 같이 맑고 선명한 색이다. 맑고 깊고 늘 젊으면서 오래가기를 바라는 뜻을 담았을 것이다. 이름과 실상이 들어맞아 명실상부(名實相符)하게 이름값을 하는 출판사는 모든 출판인의 꿈이자 많은 독자들의 기대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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