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名문장]생각하지 않는 갈대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9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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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목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번역가
정영목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번역가
《그녀는 지금이나 앞으로나 자신에게 가장 큰 죄는 자신을 속이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시간이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것을 배웠다. 생각해라―아니면 다른 사람이 너 대신 생각하고 너에게서 힘을 빼앗아가며, 너의 타고난 취향을 왜곡하고 다스리며, 너를 교화하고 소독할 수밖에 없다.

―스콧 피츠제럴드, ‘밤은 부드러워라’》
 

파스칼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말은 위험해 보인다. 마치 인간이란 당연히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17세기 파스칼 시대 사람들은 어땠는지 몰라도, 현대인에게는 차라리 ‘인간은 (생각을 할 수는 있으나) 생각하지 않는 갈대’라고 하는 묘사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가령 홍상수 감독의 ‘극장전’에서 주인공 동수는 맨 마지막에 독백을 한다. “이젠 생각을 해야겠다…생각을 더 해야 돼, 생각만이 나를 살릴 수 있어….” 동수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는 그야말로 생각해봐야 할 문제지만, 어쨌든 동수에게 생각은 늘 당연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다짐을 해야만 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밤은 부드러워라’의 여주인공 니콜에게도 생각은 자신에게 명령해야만 하는 일이다. “생각해라.” 그런데 니콜에게는 여기에 한마디가 더 붙는다. “아니면 다른 사람이 너 대신 생각한다.” 내가 생각을 하지 않으면 생각이 중단되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남이 대신 생각해주게 된다. 생각하지 않는 것은 텅 빈 상태가 아니라 남의 생각으로 꽉 차 있는 상태다.

여기에서 두 가지 깨달음이 이어진다. 하나는 남이 나 대신 생각해주면 그 생각이 나를 지배하고 나를 길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니콜은 부부관계에서 이런 깨달음을 얻지만, 이것이 권력과 정치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또 한 가지 깨달음은, 머릿속이 꽉 차 있으니까 나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남의 생각이 내 생각이라고 착각을 한다는 것이다. 결국 자신을 속이는 것인데, 니콜이 보기에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죄다. 파스칼의 말이 위험한 것은 그의 말을 액면대로 받아들일 경우 자칫 이 죄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스로 생각을 하는 것 또한 위험하다면 위험하다. 생각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한, 어차피 사람에게 안전한 길은 없다. 니콜의 깨달음도 결국 그녀 대신 생각을 해주던 남편과 헤어지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진다. 생각을 하지 않던 사람이 생각을 하게 되면, 영혼이 없던 존재가 영혼을 가지게 되면, 좁게는 사적인 관계, 넓게는 공적인 관계에 변화가 생긴다. 기존의 관계를 고수하고 싶은 사람에게 이 변화는 위험해 보인다. 대신 생각해주는 것을 시혜로 여기는 사람에게는 배신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니콜은 성장과 변화의 길을 택하고, 마치 그녀를 염두에 둔 듯 존 업다이크는 말한다. “성장은 배반이다. 다른 길은 없다. 어딘가를 떠나지 않고는 어디에도 도달할 수 없다.”(‘돌아온 토끼’)

정영목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번역가
#스콧 피츠제럴드#밤은 부드러워라#파스칼#인간은 생각하는 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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