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해의 역사속 한식]쇠고기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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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광해 음식평론가
황광해 음식평론가
왕실 종친이 소를 밀도살했다? 대형 스캔들이다.

성종 5년(1474년) 12월 7일(음력). 사헌부 이형원(李亨元)이 상소를 올린다. 내용이 대단하다. ‘동양정 이서(東陽正 李徐)가 소를 밀도살했다’는 것이다. 실제 소를 도축한 사람은 기술자인 거골장(去骨匠) 김산이다. 현장을 관리하고 진행한 이는 종(奴·노) 난동이다. 문제는 현장이다. 이서의 집이다. 이서는 태종의 증손자다. 왕족이다. 종친의 집이니 몰래 소를 도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소 밀도살은 중죄다. 더하여 이서는, 단속차 찾은 관리들을 종을 시켜 협박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라고 한 것이다. 명백한 공무집행방해다. 종 난동의 신분도 문제다. 개인이 거느린 노비가 아니다. 국가에서 종친에게 공식적으로 내려준 노비인 ‘구사(丘史)’다. 문제가 심각하다.

성종은 “구사들을 거두라”고 명한다. 이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다. 상민(常民)이 밀도살을 했을 경우, 초범인 경우도 ‘곤장 100대에 귀양 3년’이다. 아무리 왕족이지만 고작 “구사를 거두라”는 건 너무 약한 벌이라는 주장이 쏟아진다. 불과 나흘 뒤인 12월 11일, 이번엔 원로대신 한명회와 대사간 정괄까지 나선다. 이쯤 되면 국왕이라도 어쩔 수 없다. 이날 성종은 “이서의 직첩을 거두라”고 명한다. 왕족이 평민의 신분으로 떨어진 것이다. 큰 벌이다.

상소문 중에 ‘세종대왕 당시 수도정 이덕생(守道正 李德生)의 처벌을 참고해야 한다’는 문구가 있다. 이덕생은 정종의 서자(庶子)다. 세종과는 사촌지간. 역시 왕족이다. 한때 승려가 되려고 삭발했으나 세종이 만류하여 머리를 기르고 한양 도성에 살았다. 그랬던 그가 ‘소 밀도살’ 건으로 걸려들었다. 수사 과정에서 도축한 소의 상당수가 민간에서 훔친 것이라는 내용도 드러났다. 이때도 압수수색 중에 마찰이 일어난다. 마당에서 소, 말 머리뼈 40여 개와 숱한 잡뼈가 발견되었다. 처음에는 세종도 사촌의 죄를 유야무야 덮으려 했으나 불가능했다. 결국 전남 담양으로 유배를 보냈는데 이번엔 ‘너무 편한 곳으로 유배 보냈다’는 상소가 줄을 잇는다. 결국 추운 북쪽으로 유배지를 옮기던 중, 경기도 용인에서 죽었다.

성종은 “이서의 죄는 이덕생과 다르다”고 말한다. 소를 훔친 건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중벌인 ‘직첩 회수’를 명한다.

소 밀도살은 중죄다. 소가 경작의 주요 도구이기 때문이다. 고려가 불교 국가라서 고기를 먹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다시 살펴봐야 한다. 고려 말에도 금살도감(禁殺都監)이 있었다. 소의 도축을 막고 그 대신 돼지, 닭을 키우자는 것이다. 살생을 금하는 불교라면 모든 생명체의 도축을 금하는 것이 맞다. 금살도감은 살생이 아니라 소의 불법 도축을 막기 위한 기관이다. 조선시대 초기의 기록에도 금살도감은 자주 나타난다.

조선시대에도 공식적인 쇠고기 공급은 있었다. 도축서(屠畜署), 사축서(司畜署), 전생서(典牲署)에서 쇠고기를 공급했다. 쇠고기가 반드시 필요한 곳은 종묘 제사와 중국 사신 접대다. 효종 9년(1658년) 12월 17일, 이조판서 송시열은 “전생서는 제향(祭享)을 전담하고 사축서는 객사(客使)의 수요를 전담하는 곳”이라고 말한다(‘조선왕조실록’). ‘제향’은 종묘 등의 제사다. ‘객사’는 중국 사신이다.

왕실과 사대부들은 필요한 고기를 신청한 후 허가를 얻어서 구했다. 공식적인 공급이 원활할 리는 없다. 제때, 원하는 양을 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결국 밀도살, 불법거래가 일어난다. 조선 후기, “명절이 되면 갑자기 절름발이 소가 늘어난다”는 풍자가 떠돈다. 농사 못 짓는 소는 도축해도 괜찮으니 갑자기 절뚝거리는 소가 늘어난 것이다.

쇠고기 때문에 두고두고 망신을 산 벼슬아치도 있었다. 15세기 표연말(表沿沫)은 조선 전기의 문신, 문장가다. 집안도 명문가고 본인도 대제학을 지냈다. 성종 3년(1472년) 과거에 급제해 삼사 중의 하나인 예문관 관리가 되었다. 전도양양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금육’ 사건에 말려든다. 밀도살도 아니고 쇠고기를 개인적으로 거래한 것도 아니다. 당시의 관례(?)대로 홍문관 관리들의 술자리에 참석했는데 하필이면 상에 쇠고기가 있었다. 파직당하고 고향에 간 다음 쇠고기가 놓인 자리에 가면 “차마 다시 국법을 범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문제는 그 후다. 조선시대 기록문 여기저기에 ‘표연말이 금육 먹고 파직당한 이야기’가 실린다. 그 기록은 지금도 남아 있다.

황광해 음식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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