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읽기]<418>물의 결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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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결 ―박우담(19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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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노를 젓고 있다 물을 노크하고 있다 너는 물을 벗겨내고 있다 노를 저어 물의 척추를 간질이고 있다 척추는 고요를 깨트리고 있다 입에 재갈을 물린 듯한 템포 빠른 호흡을 하고 있다 너는 노를 젓고 있다 힘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나아갈 방향으로 결을 따라 애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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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추가 물꼬를 트게 물을 잔뜩 애무해야 한다 어느덧, 물은 넌출거리며 갑시게 추임새를 넣고 있다


이 시의 해석의 지평은 넓다. 그중 하나는 성적 해석이다. ‘너는 노를 젓고 있다’로 시작하는 이 뱃놀이 풍경은 고스란히 관능적이고 감각적인 성애(性愛)의 현장으로도 읽힌다. ‘물’은 상대방의 몸일 테다. ‘노크하고 있다’는 ‘벗겨내고 있다’ ‘간질이고 있다’ 등과 이미지 연결에 일관성이 떨어지는 듯해서 좀 덜컹거린다만,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물을 노크하고 있’단다. 노크는 ‘나예요’라고 제 존재를 밝히고, ‘안에 계십니까?’ ‘들어가도 좋습니까?’ ‘우리 한번 놀아볼까요?’라고 상대방 의사를 타진하는 행위이다. 사랑의 달인이 일러주는 매너 1장, 노크 없이 남의 방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사랑의 시작이나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결을 따라’가는 것이란다. 상대방의 몸과 마음의 결을 살펴서 ‘애무해야 한’단다. ‘힘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나아갈 방향으로 결을 따라’! 시의 주체를 ‘나’라고 해도 좋으련만 ‘너’라고 이인칭을 썼다. 시인은 에로틱한 진술을 자유로이 펼칠 거리를 확보했고, 시의 진하게 에로틱한 묘사에 은근한 맛이 더해졌다.

섹스뿐 아니라 매사 결이 중요할 테다. 나무를 켤 때도 돌이나 고기를 자를 때도 결을 따라야 쉽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삶이든 ‘결을 따라 애무’하면, 어지간한 과제가 해결되리라. 그런데 간간 도무지 결을 찾을 수 없는, 무쇠나 진흙덩이 같은 사람도 있고 사태도 있다. 난공불락, 에로틱한 구석이라고는 통 찾아볼 수 없는 마음의 빚어짐이어라.

황인숙 시인
#물의 결#박우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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