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335>겨울햇빛에 대하여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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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햇빛에 대하여
―고은(1933∼)


겨울햇빛 너는
흙 속의 씨앗들을 괜히 깨우지 않는다
가만가만
그 씨앗들이 잠든 지붕을 쓰다듬고 간다
이 세상에서 옳다는 것은
그것뿐
겨울햇빛 너는
지상의 허튼 나뭇가지들의 고귀한 인내를
밤새워 달랠 줄도 모르고
조금 어루만지고 간다
이 세상에서 충만이란 이런 섭섭함인가
겨울햇빛 너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않고 그냥 간다
지식이 무식보다 얼마나 유죄인가
정녕 그렇겠다
겨울햇빛 너로 하여금
이 세상의 모든 얼간이들이
한동안 싸우지 않고
한동안 피 흘리지 않을 어느 날을 꿈꾸고 온
겨울햇빛 너는
나를 지우지 않고 우선 내 그림자를 지우고 간다
통곡인들
오열인들
내 절규인들 들어주는 곳 전혀 없다
겨울햇빛 내가 간 뒤
내 쇄골로 겨울밤을 샌다   
                
  
‘지식인’이란 지식을 그 빛과 온기로 지구 생명체를 살리는 태양이라 생각하는 이들이다. 그래서 자신이 쌓은 지식으로 세상의 몽매를 깨워 보다 살 만하게 만들고자 한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세상에 앎을 전하는 게 그들의 소명이지만, 그 앎을 실천하라고 함부로 흔들어 깨우는 건 깨어난 이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현명한 지식인은 한겨울에 ‘흙 속의 씨앗들을 괜히 깨우지 않는다’. 그렇다고 두 손 놓고 있는 게 아니다. 섣불리 싹을 내밀지는 않게, 그러나 아주 얼어 죽어 버리지는 않게, ‘가만가만/그 씨앗들이 잠든 지붕을 쓰다듬고 간다’. 때로 그것이 비겁함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신중하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않고 그냥’ 가는 게 겨울의 지혜일 테다.

화자에게 세상은 지금 통곡과 오열과 절규로 가득한데, 그걸 ‘들어주는 곳 전혀 없’는 겨울이다. 이 혹한을 버티는 ‘지상의 허튼 나뭇가지들의 고귀한 인내를/밤새워 달랠 줄도 모르고/조금 어루만지고’ 갈 뿐인 지식인의 곤혹스러운 죄의식과 무력감을 겨울햇빛에 실어 보여주는 시다. 화자도 ‘내 쇄골로 겨울밤을 샌’단다. 독자는 얼른 시정(詩情) 넘치는 서두로 돌아가 마음을 녹인다. ‘겨울햇빛 너는/흙 속의 씨앗들을 괜히 깨우지 않는다/가만가만/그 씨앗들이 잠든 지붕을 쓰다듬고 간다.’ 고마운 겨울햇빛, 얼어붙은 대지를 쓰다듬으며 ‘얼지 마 죽지 마 부활할 거야’, 속삭여주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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