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식 칼럼]“분노를 참고 원통함을 삼키며 일본에 간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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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 성공으로 이끈 조엄 선생의 다짐
APEC 때 지지율 의식해 한일 정상회담 피한 정부와 대조적
“그때 정권은 뭘 했나”는 물음에 답할 수 있어야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지난주 강원 원주시에 조엄 선생(1719∼1777) 기념관이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 역대 최악이라는 한일관계를 떠올렸다. 조선 영조 때 문신인 그는 우리나라에 고구마를 처음 들여와 가난한 백성들의 배고픔을 달래준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더 큰 업적은 일본과의 외교에서 보여준 활약상이었다.

그가 조선통신사 사절의 대표를 맡아 일본으로 출발한 때는 1763년 8월이었다. 임진왜란이 종료된 지 165년이 경과한 시점이었다. 상당한 세월이 흘렀음에도 조선의 반일(反日) 감정은 여전히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조엄이 남긴 기록 ‘해사일기’에는 당시 조정의 분위기가 상세히 묘사돼 있다. 영조 임금은 조엄이 출발에 앞서 인사를 올리자 임진왜란 때 선릉과 정릉이 일본군에 의해 파헤쳐진 일을 거론하며 목이 메고 눈시울을 적셨다고 한다. 서울 삼성동에 위치한 선릉과 정릉, 두 왕릉의 훼손은 임진왜란으로 조선이 본 피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에 조엄은 “분노를 참고 원통함을 삼키며 일본에 간다”는 한마디 말로 답했다. 영조는 외교와 정세 파악 등을 위해 일본에 사절을 보내기는 하지만 과거의 치욕은 결코 잊지 않는다는 뜻을 밝혔고, 조엄 역시 같은 각오를 드러낸 것이다.

한국과 함께 과거사 문제로 일본에 등을 돌려온 중국이 10일 일본과 정상회담을 했다. 2012년 5월 이후 2년 반 만에 열린 중일 정상회담이다. 예상대로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은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를 냉랭하게 대했다. 두 정상이 만난 시간은 25분에 불과했다. 회담 장소에는 두 나라 국기도 놓여 있지 않았다고 한다. ‘정상회담’이 아닌 ‘비정상회담’이었다는 말이 나온다.

궁금한 것은 일본 쪽 반응이었다. 시 주석의 거친 태도는 일본으로서는 정상회담에서 있을 수 없는 충격적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아사히신문 사설은 ‘두 정상은 보도진 앞에서 굳은 악수를 교환했다’고만 전하고 ‘관계 개선의 뜻을 서로 확인한 의의는 크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요미우리신문도 ‘이번 회담으로 새로운 협조관계를 구축할 호기를 맞게 됐다’고 분석했다.

만약 한국의 대통령이 중국 또는 일본과의 정상회담에서 아베 총리와 같은 대접을 받았더라면 국내 반응이 어떠했을지 상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야당은 ‘굴욕 외교’ ‘외교 참사’라며 정부를 향해 집중 포화를 퍼부을 것이고, 언론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체면과 자존심을 중시하는 명분론이 득세하는 한국 사회에서 피할 수 없는 결말이다.

특히 일본에 대해 정부가 양보하는 낌새라도 보이게 되면 정권엔 치명상으로 되돌아온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번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한일 정상회담을 사실상 회피한 것은 ‘국민 정서’ 이외에 다른 이유를 찾기 어렵다. 정상회의 도중 박 대통령이 아베 총리를 잠시 만나기는 했으나 청와대는 단순한 ‘조우’였다고 의미를 축소했다. 결과적으로 중일 관계는 장기간 단절을 깨고 대화 국면에 들어섰다. 일본은 향후 중국 대륙에서 경제적 이익 확대라는 실익을 챙겼다. 반면 한국 정부는 국민 앞에 자존심은 지켰지만 중국의 이탈로 외교 입지는 크게 좁아졌다.

여기서 조엄 선생에 대한 후대의 평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엄 일행은 쓰시마 섬을 떠나 일본 본토로 가던 중 바다 위에서 선박이 고장 나는 사고를 당했다. 일행이 크게 동요하자 조엄은 일본에 보내는 국서(國書)를 등에 짊어진 채 침착하게 진두지휘했다. 또 일본 체류 중에는 사절단 한 명이 왜인에게 칼로 살해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일행은 바람이 불어 병풍만 넘어져도 “자객이 왔다”며 잔뜩 겁을 먹었다. 그러나 조엄은 태연한 듯 차분히 사태를 수습했다. 당시 사절에 동행했던 성대중이라는 선비는 1800년에 남긴 글에서 ‘임진왜란 때 정권을 잡았던 사람들이 모두 조엄과 같았더라면 국가의 수치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개탄했다.

박근혜 정부는 국제관계에서 지지율이 깎이는 일을 피하면 편하게 갈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보다 명분론이 훨씬 강했던 조선시대에도 영조와 조엄은 원통함을 삼켜가며 국익 추구에 나섰다. 요즘 급박하게 돌아가는 동북아 정세를 보면 앞으로 언젠가는 “그때 정권은 뭘 했는가”라는 질문을 반드시 받게 될 것이다. 정부는 훗날 이 물음에 대해 떳떳하게 답할 수 있어야 한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
#조엄 선생#조선통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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