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에 만난 사람]탤런트 김성환 ‘연기인생 45년 장수비결’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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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런트 공채 심사위원때 내 아들도 탈락시켜버렸죠”

“재주와 노력이 없었다면 연예계에서 장수할 수 없었을 겁니다.” 탤런트 김성환이 20년째 DJ를 맡고 있는 TBS교통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입담을 과시하고 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재주와 노력이 없었다면 연예계에서 장수할 수 없었을 겁니다.” 탤런트 김성환이 20년째 DJ를 맡고 있는 TBS교통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입담을 과시하고 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1969년 말 서울에서 대학입시 재수 공부를 할 때였다. 동양방송(TBC) 탤런트 공채 모집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와 함께 응시했다. 탤런트의 ‘탤’자도 모르고 친구가 간다고 하기에 그냥 무작정 지원서를 냈다. 평소 남 따라하기 좋아하고 흉내 내기로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어 어느 정도의 객기는 있었다.

“대단히 감사시럽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여러분 집에서 돼지 새끼들 300근 안 나간다고 걱정들 말아요. 회충약만 먹으면 내가 책임을 져∼. 닭 새끼들 모가지 비틀지 말어∼. 이 새끼들이 왜 알을 못 낳느냐? 뭘 잘 먹이면 뭐해∼. 배 속 회충이 다 빨아 먹는데. 회충약만 잘 먹이면 알을 하루에 2개를 나 버려….”

전라도 군산 출신인 그는 군산에서 장항을 오가는 배에서 사람들이 먹는 회충약을 가축에게 먹이면 효과가 있다고 속여서 ‘대박’을 터뜨린 약장수 흉내로 심사위원들의 배꼽을 뽑았다. 약장수가 건강을 위해 회충약을 먹으라면 안 사는데 가축에게 먹이면 효과가 있다는 말에 시골의 순진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속는다는 내용을 전라도 사투리로 구수하게 읊자 심사장 안은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이어진 뱀 장수 흉내와 노래, 판소리….

2000명이 넘는 지원자 중에서 선발된 12명의 합격자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한양대와 동국대, 서라벌예대(중앙대에 합병) 등의 연극영화과에서 공부한 쟁쟁한 친구들 사이에서 뽑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당시 국내 유일의 연예 잡지 ‘선데이 서울’에서 약장수로 단 번에 탤런트 시험에 합격한 인물로 소개되기도 했다.

연기 인생 45년째에 접어든 김성환 씨(63)의 탤런트 입문기다. 당시 추가로 연극계에서 추천한 18명이 들어와 TBC 탤런트 공채 10기는 30명이 됐다. 여자 탤런트 김형자, 이효춘, 엄유신, 박해숙 씨 등이 그의 동기다. 지금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는 남자 탤런트는 김 씨가 유일하다. 그는 ‘미우나 고우나’ ‘서울뚝배기’ ‘바람 불어 좋은 날’ 등의 유명 드라마에 출연했고, 연기뿐만 아니라 TBS 교통방송 라디오에서 20년째 DJ로 활동 중이다. ‘김성환 김지선의 9595쇼’를 오랫동안 했고, 지금은 오후 9시 5분부터 10시까지 ‘김성환의 서울 부르스’를 맡고 있다. KBS에서 구봉서 씨가 하던 ‘막둥이 가요 맘보’를 이어 받아 ‘김성환의 세월 60년 노래 60년’을 5년 진행한 것을 포함하면 25년째다. MBC TV ‘고향이 좋다’(‘고향은 지금’에서 개편된 프로그램)에선 리포터에 이어 메인 MC로 18년째 활약하고 있다. 잘나가는 스타 연예인 부럽지 않다.

“탤런트는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특별한 재주가 있어야 한다. 난 어렸을 때 손 박자(손가락과 손바닥으로 소리를 내는 박자)로 노래를 부르고 남의 흉내를 잘 냈다. 잡기에 능했다고 할까. 뭐든 하면 잘했다. 이런 가운데 운 좋게 탤런트가 됐다.”

자기 자랑을 하려는 게 아니다. 김 씨는 오랜 세월 방송계를 지키면서 쉽게 명멸하는 후배들을 많이 지켜봤다. 요즘엔 연예인 지망생이 철철 넘친다. 연예인이 좋다고 노력만 해선 절대 성공할 수 없는 곳이 방송계다.

“재능이 없는데 주위에 부탁을 하든 어떻게 해서 탤런트가 돼 드라마를 찍으면 그 사람의 능력이 바로 드러난다. 연기는 못하면 바로 티가 난다. 감독을 포함한 스태프, 함께 하는 연기자들이 다 느낀다. 그럼 그 연기자도 안다. 떠나지 않을 수 없다. 자존심이 완전히 무너진다. 가수, 개그맨도 똑같다. 요즘 연예인 지망생이 많은데 연예계는 수천 명 중에 한 명이 성공할까 말까 한 곳이다. 쉽게 덤벼선 안 된다.”

김 씨는 2008년 KBS 21기 공채 시험에서 심사위원을 맡아 아들 도성 씨(34)를 떨어뜨려 화제를 모았다. 미국 오하이오주립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연기에 도전한 아들을 1차 서류심사에서 탈락시켰다. 김 씨는 “아들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실력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원칙에 따라 탈락시켰다. 실력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다”고 강조했다. 도성 씨는 공채는 아니지만 이듬해 KBS2 대하드라마 ‘천추태후’에 단역으로 출연하는 등 차근차근 연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게 연기가 하고 싶으면 내 지원 바라지 말고 스스로 길을 찾아보라”는 아버지 조언에 따른 것이다. 도성 씨는 지금 KBS1 일요 아침드라마 ‘산 넘어 남촌에는2’에 고정 출연하고 있다.

김 씨도 운 좋게 탤런트는 됐지만 성공하기는 쉽지 않았다. 전라도 사투리 때문에 대사를 매끄럽게 하는 데 애를 먹었다. 드라마 단역을 전전하다 1973년 군대에 갔다. 그때 전국 팔도에서 올라온 친구들의 말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고 ‘이것이다’고 생각하고 철저히 분석해 사투리를 정리했다. 연기 때 써 먹을 수 있을 것이란 판단이었다.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등 팔도 사투리를 다 정리해 책으로 만들기까지 했다. 지금은 사투리만 가지고 1시간 이상 강의할 정도로 사투리 박사가 됐다. 드라마에서 어떤 지역의 인물 역할도 다 소화할 수 있는 이유다. 그는 1980년 언론 통폐합에 따라 KBS2로 통합될 때 방송된 ‘약속의 땅’이란 드라마에 출연하며 스타로 떠올랐다. 전국 각지에서 강원 태백의 광산으로 몰려든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에피소드를 다뤘는데 사투리를 걸쭉하게 쓰는 전라도 부부 역할을 하며 인기를 끌었다.

밤무대의 황제로 떠오른 때도 이 즈음이다. ‘약속의 땅’으로 인기가 있을 때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엠파이어 월드컵 나이트클럽’의 사장이 찾아왔다. 당시 집 한 채가 400만 원이었는데 월 200만 원 줄 테니 출연해 달라고. 나름대로 ‘원맨쇼’를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처음엔 거절했다. 약속의 땅이 끝나고 얼마 뒤 빚보증을 잘못 서 집을 날리게 생겼다. 엠파이어를 찾아갔다. 그런데 “그땐 당신이 잘나갈 때고. 지금은 안 써”라는 말이 돌아왔다. 어떻게든 살아야 했다. 그래서 엠파이어 사회자를 꼬드겨 무대 상황극을 만들었다. 인기 가수 최진희 씨가 노래를 하고 내려가면서 시작된다.

“아따 그 아가씨 겁나게 노래 잘허네.”(김) “아니 당신 뭐야. 최진희도 모른단 말여.”(사회자) “당신 어따 반말이여. 내가 전라도의 가수여∼. 전국노래자랑에 나갔다 ‘빽’ 쓴 놈 때문에 장려상 받았지만 대상은 내 거였어. 나도 노래 하나 하면 안 될까?”(김) ….

갑작스러운 등장이었지만 좌중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전라도 사투리로 노래를 불렀고 판소리, ‘홍도야 울지 마라’ 등을 하고 내려왔다. 한마디로 대박이었다. 이후 ‘김성환의 원맨쇼’는 서울시내 나이트클럽을 모두 접수했다. 지방에서도 난리가 났다. 만담과 개그, 노래, 판소리 등 전방위로 펼치는 그의 연기는 그를 ‘밤의 황제’로 만들었다. 2000년대 들어 나이트클럽의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밤무대에 서는 일은 없어졌지만 지금도 그의 디너쇼는 인기가 많다. 칠순 팔순 잔치 때도 인기 사회자로 자주 초청받는다.

김 씨는 뭐든 시작하면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린다. 걸쭉한 입담과 가수 뺨치는 노래 솜씨가 그냥 온 게 아니다. 유명 가수들을 쫓아다니며 배웠고 박동진 선생 등 판소리 명창에게서 가르침도 받았다. 연기를 하고 DJ를 보는 바쁜 일정에서도 음반도 자주 냈다. 그는 최근 ‘묻지 마세요’란 타이틀곡의 6집 앨범을 냈다.

골프도 그렇다. 그의 핸디캡은 5. 베스트 스코어는 6언더파. 1994년 4월 연기자 노조가 파업했을 때 지인이 선물한 골프채를 처음 잡았다. 레슨도 받지 않고 라운드에 나섰는데 기대 이상으로 잘 쳤단다. 그 재미에 빠져 집에 그물을 쳐놓고 쇼트게임 연습까지 했다. 그는 입문 6개월 만에 싱글을 했다. 당시 5개월여 만에 80대를 친다고 하자 개그맨 김정식 씨(55)가 믿을 수 없다고 해 함께 동서울CC(현 캐슬렉스)에 나가서 79타를 쳤다. 평생 한 번 하기도 힘든 홀인원을 6번이나 했다. 이글은 올해만 5개를 해 총 54개를 했다. 그는 ‘골프는 힘으로 하는 게 아니다. 부드럽게 스윙을 하면 채가 알아서 공을 잘 보내준다. 난 어떤 채든 100m만 보내려고 친다’는 칼럼을 한 경제신문에 기고하기도 했다.

한국 사회는 실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했다. 의도적인 접근이 아닌 평상시 어떤 모습으로 사느냐가 개인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줬다.

김성환은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시한다. 그래서 방송뿐만 아니라 일반 팬들과 직접 호흡하는 쇼무대에 대한 애착도 크다. 김성환 제공
김성환은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시한다. 그래서 방송뿐만 아니라 일반 팬들과 직접 호흡하는 쇼무대에 대한 애착도 크다. 김성환 제공
“난 엄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남에게 욕먹을 짓은 하지 말자’를 평생의 모토로 삼고 있다. 아버지께서 늘 강조하던 말이었다. 그래서 항상 말과 행동을 조심했다. 그리고 탤런트는 물론이고 개그맨, 가수 등과도 잘 지냈다. PD 등 방송사 관계자들과도 형 동생 하며 잘 지냈다. 내가 지금도 이렇게 여러 곳에서 부름을 받는 이유는 인생을 부드럽고 둥글게 살아서일 것이다.”

꾸준한 인기 때문에 정치권의 부름도 많았다. 국회의원, 시장 등에 출마하라는 유혹을 받았다. 그래서 겉으로 얘긴 하지 않았지만 조용히 준비를 했다. 군산고 졸업이 마지막이라 대학 졸업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2004년부터 ‘궁예’로 유명한 김영철 씨와 정식으로 시험 봐 경기대(경영학과·연극영화과 복수 전공)에 들어갔다. 석사학위도 받았고 지난해 박사과정까지 마치고 논문을 준비 중이다.

“지난해 어느 날 집사람이 ‘공부하기 힘들죠?’라고 묻기에 ‘왜 그랴?’ 했더니 ‘공부도 이렇게 힘든데 만날 욕 얻어먹는 정치는 왜 하려고 그래요?’라고 하더라. 그때 고민 많이 했지. 그래 평소 만나면 좋은 사람도 정치권에만 들어가면 이상하게 되는데 그냥 이렇게 국민들에게 즐거움을 주며 즐겁게 사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8남매 중 셋째로 장남인 그는 집안을 사실상 먹여 살렸다. 초창기에 번 돈은 대부분을 고향에서 농사짓는 부모님과 동생들 뒷바라지에 썼다. 그러면서도 2002년 납세자의 날 우수 납세자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2007년 화관문화훈장, 2010년 제19회 대한민국 무궁화대상 대중문화 부문, 2012년 제21회 소총·사선문화상 특별공로 부문을 수상했다. 2006년부터 2010년까지 한국방송연기자협회 이사장을 맡아 연기자들의 기본권과 복지 등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엉겁결에 연예인이 됐지만 그는 이제 한국 탤런트계의 산증인이 됐다. 국민들에게 웃음과 기쁨을 주며 즐겁게 살고 있어 60을 훌쩍 넘은 나이지만 아직 외모는 ‘청춘’이다.

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김성환#탤런트#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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