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한상복의 여자의 속마음]<70>‘남들이 그러는데’의 의미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7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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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연으로 속앓이를 하는 여자에게 동료가 묻는다.

“무슨 일 있어? 얼굴이 안됐다고, 다들 그러더라.”

모임에서 저녁 메뉴가 정해지자 한 여성이 말한다.

“그 집 맛없다던데? 우리 오빠가 얼마 전에 가봤대.”

여기서 ‘다들’이나 ‘우리 오빠’는 말하는 여성 자신일 가능성이 높다. 내가 보기에 네 얼굴이 안됐고, 내가 그 식당에 가기 싫은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남들이 그랬다고 전하는 스타일로 말한다.

이처럼 여성들은 조심스러운 말이나 반대 의견에는 특히 남을 내세우고 자기는 그 뒤로 숨는다. 자리에 없는 남을 끌어들여 에둘러 자기 의견을 말하는 셈이다.

‘남의 뒤로 숨기’의 백미를 보여주는 게 자랑이다.

한 중년 여성이 친구들에게 목걸이 자랑을 한다. “나는 됐다는데 남편이 굳이 끌고 가서는 비싼 걸로 골라주지 뭐야.”

자랑할 때도 남편을 내세운다. 남편 때문에 값비싼 물건을 억지로 목에 둘러야 했다는 이상한 얘기다. 이런 식의 자랑이 그들 사이에선 최고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물론 그녀의 남편은 목걸이를 볼 때마다 속이 쓰릴 수도 있다.

여자들의 대화에 늘 등장하는 ‘남’은 일종의 암묵적 약속이다. ‘남’이라는 꼬리표를 달아 경쟁심이나 우월감, 질투, 반대 같은 감정을 발산한다. 듣는 여성들 또한 ‘남’의 행동이나 발언을 전하는 이에게 직접적으로 미움의 화살을 쏘기 어렵다. 이로써 부정적 감정이 오가면서도 우호적인 관계는 유지되는 일종의 완충지대가 만들어진다.

‘남’은 선 긋기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누군가가 남편과의 색다른 여행 경험을 자랑하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내 동생도 거기 가봤는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하던데?”

여기서 동생은 자아의 확장이다. 직접 경험해본 것은 아니지만 동생을 내세워 공감해주지 않음으로써 너와 나는 다르다며 은근히 경계선을 긋는다.

‘남’은 상대를 치켜세우는 데도 효과가 있다. 이런 식이다. “우리 아빠도 네 남편 TV에 출연한 것 보셨대. 잘생긴 데다 말까지 잘한다고 칭찬하시더라.”

아빠가 정말로 TV에서 보았는지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 사이에서는 ‘우리 아빠도 인정해주었을 만큼 멋졌다’면 충분한 것이다.

이처럼 ‘남’은 여성들 사이에 폭넓고도 다양하게 쓰인다. 때로는 자리에 없는 ‘남’에 대해 험담을 나눔으로써 즐거움과 함께 동질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데 ‘남’은 주로 여성 자신을 위한 약속이다. 그래서인지 자기 남자가 남들 뒤로 숨으려고 할 때는 날카롭게 따지고 든다. “남들이 그런다고? 그게 누군데?” 이럴 때만은 똑 부러지는 대답을 원한다.

한상복 작가
#반대 의견#자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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