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228>보순토바하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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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순토바하
―곽재구(1954∼ )

내 꿈속에 꽃이 핀다면
저런 형상으로 필 것이다

신이 내 꿈속의 마을을 방문한다면
그는 바로 저 빛깔의 사리를 입고 올 것이다

누군가 내 꿈속에서
지상의 별들을 모두 잠재울 노래를 부른다면
그는 바로 저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볼 것이다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아기를 잠재운 어머니들이
비로소 떠나고 싶은 한세상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저 꽃의 순결한 그늘일 것이다

동무여, 가난한 내 노래는
한 잔 2루피 찻집의 호롱불보다 침침하고
환멸과 탄식으로 가득 찬 내 영혼은
그믐의 조각배 위에 위태롭게 출렁거리나니

언젠가 한번 꼭 피거든
이 꽃만큼만 피어라
언젠가 한번 빚을 죽음이거든
이 꽃만큼만 처절하게 시들어라


젊은 날에 푹 빠져서 읽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자서전’ 한 구절, ‘편도나무여, 내게 신의 이야기를 하여다오/그러자 편도나무는 활짝 꽃을 터뜨렸네’가 뭉클 떠오르게 하는 시다. 보순토바하는 ‘봄의 말, 또는 봄의 노래라는 뜻을 지닌, 느티나무만큼 큰 꽃나무’인데 노란색 꽃이 핀다고 한다.

인도를 여행하던 어느 봄날, 시인은 가지마다 노란색 꽃 가득 인 나무와 마주치고 영혼이 흔들릴 정도로 충격을 받는다. 얼마나 아름답기에? 그늘도 순결하단다. 신의 숨결과 눈빛이 느껴지는 환하고 장엄한 꽃나무! 신성할 정도로 아름답게 꽃 피운 그 나무를 실제로 보았으니 이후로 시인은 ‘꿈속에서 꽃이 핀다면/저런 형상으로 필 것이다’. 부러워라, 그런 축복은 방안풍수에게는 찾아오지 않는다. 제 발로 찾아가야 만날 수 있을 테다. 그 강렬한 순간이 세상을 떠돌고 헤매는 여행자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일 테다.

누구 못지않게 따뜻하고 아름다운 시를 써온 한 시인이 이제껏 써온시를 가난하고 침침하게 느끼고, 제 영혼이 환멸과 탄식으로 가득 찬 걸 깨닫게 하는 이국의 봄나무 보순토바하. 너무 큰 것은 사람을 압도한다. 아름다움도 마찬가지다. 시인은 압도당하면서 찬미하고 다짐한다. ‘언젠가 한번 꼭 피거든/이 꽃만큼만 피거라!’ 죽음을 걸고 처절하게 아름다우리라. 지극한 그 노래는 지상의 삶, 그 환멸과 탄식의 고단한 때를 부드러이 씻어 주리라.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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