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94>하루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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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윤명수(1941∼ )

신대방 전철역 아래 도림천 고수부지에는 매주 월요일 새벽이면 뱀이 기어가듯 인간 띠가 늘어선다 꼬부라진 지팡이들이 급식 순번표를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다 더러는 노숙을 해가면서 새벽안개로 아침을 때우고 하품을 입에 문 채 시멘트 바닥을 긁고 있다 오늘은 선착순 오백 명까지다 순번표를 받지 못한 빈손들은 돌계단에 지팡이를 내려놓고 널브러져 있다 이글거리는 햇살만 한입 가득 물고 먼 하늘만 쳐다본다 순번표 속에는 단팥빵 세 개, 이백 밀리리터 두유 한 팩, 현금 천 원이 들어 있다 어떤 이는 빵 한 봉지와 두유를 그 자리에서 천 원을 받고 되팔기도 한다 그 돈으로 라면을 사들고 휘적휘적 허기진 쪽방으로 지팡이에 끌려간다


개천 둔치에 500명이 넘는 노인이 급식 순번표를 받으러 늘어선 새벽이라니, 슬픈 풍경이다. 다들 어디서 오신 걸까. 노숙인이거나 쪽방에 사는 극빈 노인이기 쉽다. 다 늙어서 노동력도 없고 보살펴 줄 가족도 없으면 급식을 받으러 가야지 어떻게 하겠나. 이런 시를 읽으면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나이 들어 극도로 가난한 처지가 남의 일 같지 않아 새삼 암울하다.

내가 사는 비탈동네에는 폐품 줍는 노인들이 많다. 보름 전인가, 작고 마른 체구의 할머니 한 분이 입술이 바싹 타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골목 계단 아래서 숨을 고르고 계셨다. 계단에는 그 전날 내린 진눈깨비에 푹 젖은 매트리스가 쓰러져 있었다. 세 정류장 거리에 있는 동네에서부터 끌고 오셨다고 했다. 매트리스를 해체해 발라낸 철제 스프링은 6000원을 받는다고 한다. 아, 무겁고도 무거운 6000원 돈! 이런 현실이 있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화로 치밀어 오른다.

극단적 가난을 어떻게 해야 할까. 세계의 부가 상위 4%에 몰려 있다는데, 그들이 좀 풀면 나아질까. 가난은 그나마 나라만이 구제할 수 있다. 정부에서 관심 갖고 복지정책을 견실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힘 있는 사람들이 대책을 생각해야 한다. 극빈자 당사자들은 하루하루 연명하느라 생각할 힘도 없다. 온정에 ‘허기진 쪽방’…….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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