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77>흔들릴 때마다 한잔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1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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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릴 때마다 한잔
―감태준(1947∼)

포장 술집에는 두 꾼이, 멀리 뒷산에는 단풍 쓴 나무들이 가을비에 흔들린다 흔들려, 흔들릴 때마다 한잔씩, 도무지 취하지 않는 막걸리에서 막걸리로, 소주에서 소주로 한 얼굴을 더 쓰고 다시 소주로, 꾼 옆에는 반쯤 죽은 주모가 살아 있는 참새를 굽고 있다 한 놈은 너고 한 놈은 나다, 접시 위에 차례로 놓이는 날개를 씹으며, 꾼 옆에도 꾼이 판 없이 떠도는 마음에 또 한잔, 젖은 담배에 몇 번이나 성냥불을 댕긴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포장 사이로 나간 길은 빗속에 흐늘흐늘 이리저리 풀리고, 풀린 꾼들은 빈 술병에도 얽히며 술집 밖으로 사라진다, 가뭇한 연기처럼, 사라져야 별 수 없이, 다만 다 같이 풀리는 기쁨, 멀리 뒷산에는 문득 나무들이 손 쳐들고 일어서서 단풍을 털고 있다


술 마시는 사람의 정서만이 아니라 술집 분위기가 확 살아나는 시다. 우리나라 술꾼들은 그저 술만 마시는 게 아니라 정을 나누면서 술을 마신다. 술집을 나서다 후배 일행이라도 만나면 흔히 술값을 내주거나 안주 하나라도 시켜 주고 간다. 아름다운 술꾼 풍토여라.

딱 요즘 같은 날씨, ‘곰장어’ 굽는 냄새와 포장 술집의 불빛이 퇴근길 직장인을 유혹한다. 그 유혹에 이끌려 한잔하는 게 우리나라 서민 가장의 큰 낙이리라. 음주율이 높고, 그만큼 일이 많고 스트레스가 많은 우리나라 성인 남성들. 이 시를 읽으며 ‘꼭 내 얘기 하는 것 같네!’ 하실 이 많으리. 화자는 마음이 여리고 감정이 풍부하고 친구 좋아하고 술 좋아하고, 일도 열심히 하는 사람일 테다. 스트레스가 심해 삶이 흔들릴 때, 그 고비를 술 한잔 마셔 넘길 수 있다면 왜 그러지 않으랴. 얼른 풀어줘야지 그대로 거세게, 거듭 흔들리면 추가 떨어져나가 버린다. 대기권 밖으로 날아가 버린다. 그러기 전에, ‘흔들릴 때마다 한잔!’ 술꾼들의 모토이자 생활의 지혜! 그런데 너무 자주 흔들리면 곤란할 테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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