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칼럼/김화성]차르르! 차르르! ‘자전거 천국’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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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성 스포츠레저전문기자
김화성 스포츠레저전문기자
어린 가을. 모시바람이 사각사각하다. 바람 속에 뼈가 없다. 육즙이 모두 휘발돼 새물내가 난다. 고슬고슬하다. 봄바람은 갓김치처럼 알싸하지만, 어린 가을바람은 상크름하고 새콤달콤하다. 춘풍은 는실난실 모과빛이지만, 초가을 바람은 선들선들 푸르스름하다.

왜 유목민들은 가을을 ‘어린 가을, 젊은 가을, 늙은 가을’로 나눴을까. 그만큼 가을이 금쪽같았으리라. 햇살 한 가닥, 바람 한 자락, 구름 한 조각,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린 가을엔 더넘바람이 한여름 노여움에 발끈한 혈압을 낮춰주고, 젊은 가을엔 소슬바람이 사람의 애간장을 스리 스리랑 녹여댄다. 늙은 가을엔 서릿바람이 외로운 나그네의 가슴팍을 뼈가 시리도록 파고들리라.

선득선득 바람 불어 좋은 신새벽. 둥글둥글 ‘쇠 말’을 타고 집을 나선다. 저만치 산잔등에 ‘왕겨빛 햇귀’가 삐죽이 올라온다. 금세 하늘엔 뿌옇게 동살이 튼다. 붉고 노르스름한 볕살 올올이 해말갛게 기품이 서렸다. 길섶 풀잎에 이슬방울들이 그렁그렁하다. 강둑엔 새품 갈품, 억새와 갈대꽃이 하얗게 올라오고 있다.

한강은 안개꽃이 자욱하다. 몽롱한 물안개가 끝도 시작도 없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그 속을 차르르! 차르르! 두 개의 동그라미가 굴러간다. 바람을 헤가르고 나아간다. 영차! 영차! 쇠똥구리가 커다란 두 개의 쇠똥을 궁굴리며 전진한다.

자전거는 ‘굴렁쇠 말’이다. 언틀먼틀 자갈길도 스르르 은근슬쩍 잘도 넘어간다. 면발 뽑는 중국집 주방장처럼 땅바닥을 치대고, 늘이고, 패대기치며 굴러간다. 차르르! 또르르! 바퀴살은 끊임없이 부드러운 ‘길발’을 뽑아낸다. 세상의 모든 길을 먹어치운다. 그렇게 끈지게 식탐하며 떡가래 같은 ‘길똥’을 누며 간다. 길은 ‘자전거의 비단구렁이똥’이다.

인산거해(人山車海). 휴일 자전거길은 어디나 북새통이다. 울긋불긋 라이더들이 룰루랄라 왁자하다. 유선형의 헬멧들이 제비 날개깃처럼 빠릿빠릿하다. 온갖 새들이 바람을 주욱∼ 광목 가르듯 날아간다. 울뚝불뚝 쫄쫄이옷 안의 근육들이 완강하고 억세다. 동호인들은 물결을 거슬러 오르는 버들치떼처럼 끼리끼리 잽싸다.

세상의 온갖 자전거들이 다 나왔다. 시장바구니 달린 주부용 자전거가 엉뚱하다. 접이식 미니벨로는 앙증맞고 깜찍하다. 수천만 원대의 티타늄 소재 MTB(Mountain Bike·산악자전거)는 그저 딱 한 번만 타고 싶다. 도대체 왜 그렇게 비쌀까. 바퀴가 자그마치 26인치가 넘는 옛날 쌀집자전거를 타고 유유히 페달을 밟는 할아버지도 있다. 페달도 다리를 딱 벌린 채 양반 자세로 밟는다. 장엄하다. 절창이다.

둔치 자전거길엔 눈을 부릅뜨고 으르렁거리며 질주하는 트럭이 없다. 한갓지다. 코뿔소처럼 콧김을 킁킁거리며 돌진하는 중장비 차량도 없다. 편안하다. 번쩍번쩍 눈을 부라리는 버스도 없다. 휴우∼ 안심이다. “빠앙∼빠앙∼” 신경질 내는 승용차도 없다. 귀가 순하다.

가을 강물은 웅숭깊고 담담하다. 물주름에 윤슬이 반짝반짝 해뜩인다. 그 콸콸 쏟아지던 질풍노도의 여름붉덩물도 가뭇없이 사라졌다. 계곡의 듣그러운 물소리도 숨을 죽였다. 강물은 여위었지만 더욱 가슴이 넓어지고 속이 깊어졌다.

저 멀리 산허리 메밀꽃이 옥양목 빨래가 널린 듯 눈부시다. 들판의 벼이삭들이 누렇게 여물고 있다. 길섶 도랑가엔 자줏빛 물봉선 꽃날이 소라고둥처럼 날아갈 듯하다. 구불구불 먹구렁이 산주름이 아슴아슴 첩첩하다. 코스모스는 한들한들 허허롭다.

자전거는 보통 시속 15∼20km로 달린다. 한강 팔당댐에서 충주댐까지 남한강 코스는 10시간 넘게 잡아야 한다. 올 땐 자전거를 고속버스 짐칸에 싣고 온다. 북한강 코스는 춘천역에서 전철을 타고 올 수 있어 안성맞춤이다. 느릿느릿 예닐곱 시간쯤 걸릴까.

자전거 안장에 앉아 코를 한옥 처마처럼 살짝 위로 올리고, 먼 하늘을 바라본다. 그 순간 650여 개의 온몸 근육이 우우우 잠에서 깨어난다. 서른세 개의 척추뼈가 일제히 곧추선다. 목뼈 7개가 마디를 풀고, 등뼈 12개가 우두둑! 소리를 낸다. 허리뼈 5개가 기지개를 켜고, 엉치뼈 5개와 꼬리뼈 4개는 반짝 눈을 뜬다.

두둥! 달려오는 가을산. 아하, 내가 살아있구나! ‘벌레 문 자국같이 조그맣고 가려운 이 사는 기쁨’(황동규 시인). 온갖 찜부럭이 말갛게 가신다. 가을은 참 어디 가도 좋아라. 마음이 아삭아삭 가든가든하다.

김화성 스포츠레저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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