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03>이력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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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5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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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서
―오은(1982∼)

밥을 먹고 쓰는 것.
밥을 먹기 위해 쓰는 것.
한 줄씩 쓸 때마다 한숨 나는 것.

나는 잘났고
나는 둥글둥글하고
나는 예의 바르다는 사실을
최대한 은밀하게 말해야 한다. 오늘밤에는, 그리고

오늘밤에도
내 자랑을 겸손하게 해야 한다.
혼자 추는 왈츠처럼, 시끄러운 팬터마임처럼

달콤한 혀로 속삭이듯
포장술을 스스로 익히는 시간.

다음 버전이 언제 업데이트 될지는 나도 잘 모른다.
다 쓰고 나면 어김없이 허기.
아무리 먹어도 허깨비처럼 가벼워지는데

몇 줄의 거짓말처럼
내일 아침 문서가 열린다.
문서상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다.


첫 연에 이력서에 대한 모든 말이 들어 있다. ‘밥을 먹고 쓰는 것’, 밥 기운으로야 열과 성을 다해 쓸 수 있다! ‘밥을 먹기 위해 쓰는 것’, 자기성찰의 한 방편이나 취미로 이력서를 쓰는 사람도 아주 없으라는 법은 없겠지만. ‘한 줄씩 쓸 때마다 한숨 나는 것’. 더 말해 무엇하리. 이 세 줄 시구에 무한한 공감을 표할 독자가 수두룩하리라. 아, 이력서!

화자는 이력서를 쓰는 요령도 알려준다. 직장사회는 ‘잘나고 둥글둥글하고 예의 바른’ 사람을 원하니까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걸 어필해야 한다. 자랑을 하되 겸손하게! 이력서를 쓰는 시간은 ‘포장술을 스스로 익히는 시간’. ‘혼자 추는 왈츠처럼, 시끄러운 팬터마임처럼’ 낯간지러운 이 짓을 하고, 하고, 또 해야 한다. 지긋지긋하다.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지고, 힘이 빠지고, 허기가 진다. 취직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것 같은 이름이여!

이력(履歷), 즉 ‘지금까지 닦아 온 학업이나 거쳐 온 직업 따위의 경력’을 적어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를 문서로 작성한 것이 이력서다. 거기 한 줄이라도 더 올리면 취직하는 데 유리하겠지. 요즘 청년들이 입에 달고 사는 ‘스펙’이란 말에 넌덜머리가 날 때가 있었다. 그들 머릿속에는 ‘스펙’이라는 말밖에 없는 듯했다. 삶의 본질과 아무 상관없는, 껍질뿐인 스펙. 거기 매여 있는 모습이 아름답지 않았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현실적 욕망만 강해서 그런 게 아니었구나. 생존이 걸린 취업의 길 위에서 치열하게 전술을 연마하는 것이었구나. 모쪼록 오늘밤 작성한 이력서로 직장의 문을 통과하시길!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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