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해제 MB5년]<7> MB의 2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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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5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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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 이재오 권익위장을 ‘권력위원장’ 소개… 실수였을까

2009년 9월 30일 청와대. 정운찬 국무총리(앞줄 가운데)와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오른쪽)이 국민권익위원장으로 돌아온 이재오 전 의원(앞줄 왼쪽)을 축하하고 있다. 동아일보DB
2009년 9월 30일 청와대. 정운찬 국무총리(앞줄 가운데)와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오른쪽)이 국민권익위원장으로 돌아온 이재오 전 의원(앞줄 왼쪽)을 축하하고 있다. 동아일보DB
강재섭 대표다운 위로였다.

2008년 5월 하순 어느 날. 강재섭은 20일간의 ‘지리산 은둔’을 마치고 귀경한 이재오 의원에게 “저녁이나 같이하자”고 연락했다. 이재오는 18대 총선에서 창조한국당 문국현 대표에게 일격을 당한 뒤 부인, 아들과 함께 지리산을 떠돌았다.

며칠 있다가 미국 존스홉킨스대로 떠나려던 참이었다.

강재섭=“니 자동차 면허는 있나? 미국에서 운전면허 없으면 병신 된다.”

이재오=“그냥 걸어 다니지 뭐….”

강재섭=“은행에서 카드로 돈은 뽑을 줄 아나?”

이재오=“….”

강재섭=“미국에서는 비서도 없고, 부인도 없을 텐데 어떻게 살려고 그러냐?”

이재오=“그냥 해보는 거지 뭐….”

강재섭=“영어는 할 줄 아나?”

이재오=“….”

강재섭=“그래 가지고 미국에서 버틸 수나 있겠나?”

한때 당 대표 경선을 놓고 감정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사이. 나이도 이재오가 세 살 위였지만 두 사람은 사석에서 말을 놓고 지냈다.

이재오는 그렇게 여의도를, 한국을, 아니 이명박 대통령(MB)을 떠났다.

이재오의 낙선은 MB에게도 충격이었다. 총선 직전 한나라당 이방호 사무총장은 기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재오는 사실 내가 보면 MB와 2촌쯤 되는 관계다. 나 같은 사람과 MB의 관계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옆에서 같이 만나보기도 했고, MB에게 이재오 얘기를 듣기도 했는데 이재오에 대한 MB의 속정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바꾸기 어려울 만큼 깊고 짙다. 그런데 이재오가 지역구에서 져봐라. MB가 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재오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살려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을 만든 가장 큰 공신은 사실 이재오다.”

이방호의 말처럼 이상득(SD) 전 국회부의장은 피를 나눈 2촌이었지만, 이재오는 MB의 ‘정치적 2촌’이었다. 사실 MB 정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동업자(同業者) 정권’이라는 것이었다. 그 이전의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 아니 박정희 전두환 정권까지도 민주화 또는 쿠데타 동지들이 만든 ‘동지(同志) 정권’이었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은 ‘기브 앤드 테이크(give and take)’ 관계로 맺어진 동업자 정권이라는 것이다.

그런 동업자 정권에서 ‘2촌’은 특별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2009년 9월. MB는 유엔총회 참석차 미국으로 떠나기 전 이재오에게 전화를 건다. “조만간 무슨 연락이 갈 거다.”

이재오는 10개월의 존스홉킨스대 생활을 마치고 귀국해 모교인 중앙대 국제대학원 객원교수를 지내며 재기를 노리고 있었다. 문국현이 비례대표 공천과정에서 6억 원의 당채(黨債)를 발행해 재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MB가 미국으로 떠난 뒤 이번엔 정정길 대통령실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난데없이 한나라당 탈당계를 내라는 것이었다. 이재오는 황당했지만 정 실장은 별다른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난 뒤 조금 있다 다시 연락이 왔다. “그게 국민권익위원장 자리를 얘기하는 것인데…. 권익위원장 자리를 맡으려면 당적이 없어야 하니까 탈당계를 내라고 했던 겁니다. 나는 (대통령의 말씀을) 전달만 하는 것이니까 나머지는 이 의원이 알아서 하세요.”

정정길은 아마 탈당계 얘기만 하면 이재오가 다 알아들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MB와 이재오는 ‘2촌 간’이니까…. 하지만 ‘이재오 권익위원장 카드’는 MB가 미국 순방 중 혼자 생각해낸 아이디어였다. 정 실장도 몰랐고, 청와대 정무라인도 전혀 알지 못했다. 이재오 자신도 “솔직히 내가 국민권익위원장이 뭐 하는 자리인지 어떻게 아나?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때 이런저런 기구가 합쳐진다는 건 알았지만 관심도 없었는데…”라고 실토할 정도였다. 국민권익위원회는 인수위 때 기존의 국민고충처리위원회와 국가청렴위원회, 그리고 행정심판위원회를 통합해 신설한 기관이었다. 이재오가 모를 만했다.

이재오는 급기야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차관급)으로 있던 박영준에게 전화를 걸어 “야, 권익위원장이 뭐 하는 자리냐”고 묻기까지 했다.

결국 순방 중이던 MB가 직접 전화를 거는 수밖에 없었다. 워낙 대통령의 머리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인사안이라 청와대 실무자들은 서류 준비에도 애를 먹었다. ‘이재오의 재산’이야 세상이 다 아는 것이지만 국민권익위원장에 지명하기 위해서는 법적으로 시민단체 추천이 필요했다. 아무리 ‘왕의 남자’이지만 그래도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이재오였다. 시민단체 추천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MB 정부 출범 첫 해의 한나라당 원내대표로 추대된 홍준표. 그는 “MB가 시켜줬지만 그만큼 일로써 보답했다”고 말했다. 동아일보DB
MB 정부 출범 첫 해의 한나라당 원내대표로 추대된 홍준표. 그는 “MB가 시켜줬지만 그만큼 일로써 보답했다”고 말했다. 동아일보DB
9월 30일, MB는 전날 임명장을 수여한 정운찬 국무총리를 비롯한 신임 각료들과 떠나는 장관들, 그리고 이재오를 초청해 만찬을 베풀었다.

이명박=“(신구 국무위원들을 일일이 소개하며) 여기는 신임 이재오 국가권력위원장이고….”

사회(박형준 정무수석비서관)=“(당황하며) 대통령님, 국가권력위원장이 아니고 국민권익위원장입니다.”

이명박=“(웃으며) 그게 그거 아냐?”

그래서일까. 박영준은 나중에 “권익위원장은 국무회의 때 대통령, 장관과 함께 나란히 앉는데 이재오 위원장을 보는 장관들의 눈빛이 달랐다”고 술회했다.

여하튼 이재오 권익위원장 카드에 대해 한승수 전 국무총리는 “고스톱으로 치면 1타 몇 피라고 해야 할까? 대통령이 참 절묘한 수를 뒀다”고 평가했다. ‘낭인 생활’을 끝낼 수 있을 뿐 아니라 MB 표현처럼 ‘권력위원장’의 위상을 활용해 약자를 보살피고, 민생을 챙기는 ‘정치적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거기에 국무회의 군기반장 역할까지 하게 됐으니 최소 1타 3피의 효과는 거둔 셈이다.

MB에게는 이재오 말고도 ‘2촌쯤 되는 사이’가 한 사람 더 있었다. 홍준표 경남도지사다.

고려대 후배이고, 15대 총선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해 미국 워싱턴에 머물 때 늘 곁에서 위로해주던 동생이었다. 홍준표 역시 선거법 문제로 재판에 회부되자 의원직을 사퇴하고 워싱턴에 합류했다. 홍준표는 MB를 “형님”이라 불렀고, 부인 김윤옥 여사에게도 “형수, 내 밥 좀 도∼” 하며 스스럼없이 대했다. MB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김 여사는 한나라당 여성의원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홍준표는 내 시동생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러나 이재오가 속이 깊고 충직한 ‘관우’라면 홍준표는 손아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 ‘장비’였다. 물론 홍준표의 생각은 다르다. 홍준표는 “나는 MB에게 아무런 채무가 없다. 채권만 있을 뿐. 하지만 이젠 그 채권도 포기하겠다”고 했다.

채권이 뭐냐고 묻자 홍준표는 “내가 MB를 세 번이나 구했다”고 했다.

“MB는 재선(1996년 15대 총선)에 성공하자 ‘기수 파괴론’을 내걸고 대권 도전 의사를 드러냈다. 현대건설 CEO 경력까지 합치면 자기가 4선 이상이라는 거지. YS(김영삼) 임기가 2년이나 남았을 때라 청와대로서는 그냥 좌시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그러다 선거법 위반 사건이 터졌다. 압수수색을 해보니 ‘PLP(President Lee Plan)’라는 문건까지 나왔다. 레임덕을 걱정하던 YS는 구속수사를 지시했다. 그때 마침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장에 강삼재 당시 사무총장이 왔기에 내가 ‘이명박은 우리 시대의 신화 같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정치판에 끌어들일 때는 언제고 선거법 위반으로 몰고 가는 건 또 뭐냐. 절대 구속하면 안 된다’고 했다. 사실은 ‘내가 검사로 슬롯머신 사건을 수사할 때 YS 대선자금도 조사한 게 있는데 (MB를 구속하면) 그걸 깔 수도 있다’고 협박했다. 아마 그날 저녁 여권 수뇌부 회의에서 ‘홍준표는 통제가 안 되는 놈 아니냐’는 얘기가 오간 모양이다. 결국 MB는 구속을 면했다.”

그리고 2002년 서울시장 출마 때 이회창 총재는 홍사덕 의원을 염두에 뒀지만 자기가 MB를 밀었고, 2007년 대선 당시 BBK 사건이 불거졌을 때도 ‘도리 없이’ 방패막이가 돼줬다는 것이다.

다시 홍준표의 증언. “MB가 김경준과 뭘 같이한다고 하기에 내가 김경준을 보니 딱 사기꾼이었다. 그래서 안 된다고 했다. MB도 ‘알았다’고 했는데 내가 없을 때 자기들끼리 그 사업을 해서 사달이 난 것이다. 나중에 문제가 되니까 ‘홍 의원이 하지 말라고 했던 건데…그래도 홍 의원이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소연해서 내가 (BBK 대책팀에) 합류한 것이다.”

18대 총선이 끝난 직후 홍준표는 원내대표로 선출된다. 말이 선출이지 홍준표 원내대표-임태희 정책위의장 팀은 단독후보였다. MB의 뜻이었다.

홍준표는 엔도르핀이 솟았다. 이춘식 전 의원의 기억. “MB 취임 첫해는 한마디로 법안전쟁이었다. 어느 정권이나 마찬가지이지만 MB 개혁안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는 국회의 뒷받침이 무엇보다 절실했다. 그런데 그해 말 대표적 개혁입법안이라고 꼽은 85건 중 50건 이상이 통과됐다. 어느 날 밤늦게 국회를 마치고 자정이 넘어 이상득 부의장과 여의도 생맥줏집에서 술을 마셨는데 SD가 ‘이 정도면 성공이다. 아쉬운 점도 있지만 홍준표가 잘해냈다’고 하더라.”

그리고 2010년 6월. MB는 홍준표를 청와대로 불렀다. “이번에 대통령실장을 3선 의원 이상으로 하면 좋겠는데 누가 좋을까? 국회의원 배지를 떼고 올 사람이 있을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홍준표는 “각하, 이재오 의원이 어떻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이재오는 지역구인 서울 은평을 재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재선거도 재선거이지만 MB는 “그 사람은 참모를 할 사람이 아니야”라고 잘라 말했다.

청와대를 나와 여의도 국회의사당으로 돌아가는 길. 차가 마포대교쯤에 이르렀을 때 홍준표는 MB에게 전화를 걸었다. “각하, 임태희 의원은 어떻습니까?”

며칠 뒤 김해수 정무1비서관이 찾아왔다. 김 비서관은 홍준표의 고려대 법대 후배이기도 했다. “형님, 바보요? 다른 일은 그렇게 머리가 잘 돌아가면서 그때는 왜 그렇게 대답한 겁니까? 그러니 안 되는 겁니다. 그냥 ‘제가 들어가서 돕겠습니다’라고 한마디만 하면 될걸…. 이재오를 시킬 거면 이재오를 부르지, 왜 형님을 불렀겠소.”

김해수의 해석으로는 MB가 홍준표에 대해 ‘자기 욕심만 차리려는 놈’이라고 생각했을 거라는 얘기였다.

MB가 정말 홍준표에게 대통령실장을 제안하려고 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후 MB와 홍준표의 애증(愛憎)은 ‘널뛰기’를 거듭한다.

어느 날, 임태희 대통령실장이 홍준표에게 환경부 장관 자리를 들고 찾아왔다. 홍준표가 원하던 건 법무부 장관이었다. 홍준표는 임태희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 “혹시 ‘타타타’라는 노래를 아느냐”고.

‘네가 나를 모르는데/난들 너를 알겠느냐/한 치 앞도 모두 몰라/다 안다면 재미없지….’ MB에게 전해 달라는 말이었다.

김창혁 선임기자 chang@donga.com
#이명박#이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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