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식 칼럼]기적이 견제를 부르는 우리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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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8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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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조선이 외국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1866년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으로 프랑스 신부 9명이 처형당하는 병인박해가 일어난다. 구사일생으로 청나라로 탈출한 프랑스 신부 리델은 청나라 주재 프랑스 공사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프랑스 측은 청나라에 강력히 항의하면서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니 청나라가 이번 일에 책임을 지라”고 요구했다. 150년 전만 해도 한국은 중국에 딸린 나라이자 불상사가 생기면 협상 대상도 되지 않는 나라로 인식되고 있었다.

‘청나라 속국’에서 ‘에너지 한국’으로

19세기 말 대한제국이 소유했던 미국 워싱턴의 주미 공사관 건물을 우리 정부가 다시 매입했다는 소식이 최근 전해졌다. 이 역시 조선 말기의 서글픈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청나라는 우리가 1888년 미국에 공사를 파견하려 하자 발목을 잡고 나섰다. 그들은 세 가지 원칙을 요구했다. 조선 공사가 미국에 가면 반드시 청나라 공사와 함께 미국 대통령을 만날 것, 연회석상에서 조선 공사가 청나라 공사보다 앞자리나 상석에 앉지 말 것, 중요한 문제가 있으면 청나라 공사와 먼저 상의하라는 것이었다. 웬만하면 묻어두고 싶은 역사를 새삼 꺼낸 것은 그때와는 너무도 달라진 한국의 위상과 비교하고 싶어서다.

한국의 변화를 놓고 세계는 ‘기적’이라고 부른다. 오랫동안 중국의 위세에 눌려 살다가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거친 뒤 나라가 분단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북한의 도발로 6·25전쟁까지 겪었다. 더 물러설 수 없는 궁지에 내몰렸던 나라가 어느 순간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더니 놀라운 에너지를 분출하기 시작했다. 세계경제의 심장부인 뉴욕 타임스스퀘어 광장에 삼성과 LG의 광고판이 내걸렸다. 올림픽 같은 스포츠 행사에서는 세계 상위권의 메달 실적을 뽐낸다. 한류 열풍은 세계 젊은이들을 들썩이게 만들며 ‘새로운 한국’을 알리고 있다. 한국의 어두운 과거를 알고 있는 외국인들은 미묘한 심정에 빠질 수밖에 없다.

지난해 봄 대만을 방문했을 때 수도 타이베이의 한 공연장 앞에는 한국의 아이돌 그룹 슈퍼주니어의 공연을 보기 위해 청소년 팬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2010년 11월 광저우 아시아경기 때 대만의 여자 태권도 선수 양수쥔이 한국계 심판에 의해 실격패를 당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대만에 반한(反韓) 정서가 확산된 직후였다. 한국산 라면을 발로 부수고 태극기를 불태우는 시위가 벌어졌다. ‘한류 열풍’과 ‘반한 감정’이 공존하는 배경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한 대만 인사가 궁금증을 풀어줬다. 그는 “반한 감정 중에는 대만보다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뒤졌던 한국이 대만을 추월한 것에 대한 경쟁 심리도 자리 잡고 있다”고 전했다.

新부국강병 이끌 후보 안 보이니

같은 시선에서 보면 중국 내부에서 “한국은 공자를 한국인이라고 주장한다”는 터무니없는 소문이 사실처럼 받아들여지는 것도, 우리나라가 강릉단오제를 세계무형유산으로 등록하자 중국 누리꾼이 “한국이 중국의 단오절을 빼앗아 갔다”며 격한 감정을 드러낸 것에 대해서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강릉단오제의 경우 단오절 자체가 아니라 강릉에 전해오는 단오절 축제를 세계유산에 등록한 것인데도 중국인들은 과민 반응을 보였다. 과거 역사에 대한 중국의 우월감이 한국에 대한 견제 심리와 함께 작동한 것이다.

우리 근대사에서 가해자였던 일본의 정치인들이 독도와 위안부 문제를 놓고 선진강국의 체통을 벗어던진 채 말을 뒤집고 있는 것도 일본의 침체와 한국의 변화에 대한 복잡한 감정의 산물로 읽을 수 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한국과 중국의 빠른 성장에 대한 일본의 불안감이 반영돼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의 위상이 더 높아진다면 경쟁 상대로서 강한 견제는 물론이고 문화적, 역사적 측면에서도 예상치 못한 도전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최근 동북아시아에서 벌어지는 첨예한 갈등은 이 지역에 새로운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시대가 펼쳐지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중국은 2050년 국민소득 4만 달러의 선진국에 진입하는 것을 국가목표로 삼고 있다. ‘거대한 중국’을 유지하기 위한 자원 확보와 국익 확대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을 태세다. 일본의 노다 요시히코 총리는 “해양국가인 일본은 멀리 떨어진 섬을 포함해 영토와 영해가 중요하다”며 노골적으로 영토 욕심을 드러냈다. 러시아는 유럽 위주의 정책이 글로벌 경제위기 등으로 한계에 부닥치자 극동 개발을 통해 국가의 활로를 찾아 나섰다. 미국 역시 지난해 ‘아시아로의 중심축 이동’을 선언했다. 100여 년 전 한반도 주변에서 벌어졌던 강대국들의 각축전을 다시 보는 듯하다.

한국은 그 때 보다는 강한 힘을 갖고 있지만 닥쳐올 파도를 잘 헤쳐 나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올해 말 뽑힐 새로운 대통령은 그만한 리더십과 혜안을 갖고 있을까. 불행하게도 대통령 후보 중에는 대한민국의 부국강병에 대해 절실한 의지를 갖고 있는 사람이 없어 보인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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