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이동순]백석의 詩가 주는 따뜻한 위로와 격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6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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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 시인·영남대 교수
이동순 시인·영남대 교수
고향이란 말이 언제부터인가 낯설고 서먹하게 됐다. 고향에 대한 애착도 엷어지고, 고향이란 말의 느낌조차 낡고 진부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마저 생겨났다. 하지만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 자신이 태어난 고향이 있고, 그 고향을 마음속에서 언제나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우리에게 돌아갈 고향이 과연 있기는 있는 것인가? 현대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정신적 실향민이 돼 버렸다. 정처와 지향이 사라진 사람들에게 고향은 이제 아련한 옛 추억의 박물학적 지식일 뿐이다. 우리가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근원적인 고향에 대한 연민은 누구나 갖고 있다. 그 고향이란 다름 아닌 대지, 즉 자연이다.

그의 작품엔 풍성한 고향 이미지 넘실


7월 1일 탄생 100주년을 맞는 한국 문학사의 대표 시인 백석의 작품에는 풍성한 고향 이미지와 모티브가 넘실거린다. 백석이 자신의 시 세계에서 그린 고향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원불변의 장소성을 지닌다. 백석 시인은 그 고향 테마 시를 통해 우리의 조상들이 대대로 가꾸어 온 고향이란 터전을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지켜내야 하고, 거기에 의지하며 가슴속에서 고향의식을 회복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백석의 고향 테마 시 작품들은 오늘날 문학에서 중요한 담론의 하나인 생태주의적 인식과 매우 밀접한 관련성을 갖는다. 백석의 시 작품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고향의 풍경은 하나같이 때 묻지 않은 순정하고 고결한 민족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한편 백석의 시 작품은 우리가 점차 잃어가고 있는 인간성 문제와 그것의 회복에 대해 강력한 코멘트를 발산하고 있다. 그것은 주로 풋풋하고 건강한 삶의 원형질 회복과 관련된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인간성 회복과 생명공동체 부활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시 ‘여우난골족’이 지니는 깊은 감동의 파장도 이와 관련된다. 명절날 모든 일가친척들이 일제히 종가에 모여 조부모를 중심으로 어른은 어른끼리,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광경이 잘 그려져 있다. 전통시대 농경사회의 전형적인 대가족 풍경이다.

백석 시인은 그토록 참담하던 위기와 붕괴의 시대에서 한순간도 넉넉한 웃음과 정신적 여유를 잃지 않았다. 고통의 세월 속에서 시인이 해야 할 일은 핍박을 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신선한 삶의 생기와 즐거움으로 넘치게 하고, 따뜻한 정서의 온기를 회복시켜 주는 것으로 판단했다. 그리하여 백석의 시 작품 전편에는 밝고 쾌활하며 건강한 시어와 정감 어린 표현들로 넘쳐난다. 무려 80년 전에 천재적인 한 젊은 시인이 식민지 문단에 제출한 문학적 보고서는 이후 세월에 이르도록 삶의 구체적 해법과 포즈를 보여준다. 그의 시에는 훼손되고 망실된 것에 대한 간절한 회복의 갈망이 들어 있다. 메마른 인간의 삶에 신선한 생기와 낙천성이 되살아나기를 시인은 염원했다.

넉넉한 웃음-정신적 여유 잃지 않아


20세기 이래로 한국인들이 겪어온 가장 고통스러운 시련은 민족의 분열과 그로 말미암은 일체감의 상실이다. 통한의 분단세월 속에서 전통적 생활공동체와 문화들은 현저히 붕괴되고 해체됐다. 원래 하나였던 모든 실체들이 조각조각 나뉘어 분단과 이산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백석의 대표 시 ‘모닥불’은 모든 분리된 사물의 실체가 하나로 따뜻한 조화를 이루어 대화엄(大華嚴)의 미학적 장관을 연출하는 멋진 광경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백석 시정신의 사상적 총화를 담고 있다. 가난하고 못생긴 사물, 삶의 중심에서 밀려난 소외 존재들을 시인은 따뜻하게 감싸 안는다. 이를 일러 대승적 자비의 정신으로 불러도 무방하리라. 그런 관점에서 보면 ‘탕약’이란 시 작품도 동일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서로 다른 이질적 재료들이 같은 약탕관 안에서 배합돼 끓고 있는 광경의 묘사가 바로 그것이다. 아름다운 조화의 정신이 아니고 무엇이랴. ‘모닥불’은 돌에 새겨 백석의 모교인 오산학교(현 오산고) 교정에 지난해 세워졌다.

최근 백석전집이 시와 산문 두 권으로 발간됐다. 그동안 여러 판본들의 심각한 오류를 바로잡고, 새로 찾아낸 작품까지 수합해 정본다운 면모를 갖추려 노력했다. 백수십 편의 작품을 다시 읽어보며 우리는 새삼스러운 놀라움을 갖게 된다. 20세기 전반에 발표된 작품이지만 세월의 공백을 껑충 뛰어넘어 현재라는 시간성 속에서도 여전히 맑고 싱싱한 문학정신을 강렬하게 발산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우리의 상처받고 비뚤어진 삶까지도 교정시키려 애를 쓰고 있음을 발견한다. 고향의식, 인간성, 낙천성, 생명력, 조화의 정신. 이 다섯 가지가 반드시 회복돼야 전체 한국인의 살길이 열린다는 중요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긴급하게 보내고 있다. 갈등과 상극은 낡은 시대의 유산이다. 어떻게든 사랑과 상생으로 거듭 태어나야 한다는 점을 백석의 시정신은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한국문학사에서 백석과 같은 큰 시인이 있어서 너무나 즐겁고 행복하다.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백석 시인은 오늘도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줄기차게 보내주고 있다.

이동순 시인·영남대 교수
#문화 칼럼#이동순#백선#백석 탄생 10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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