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는 지구인]⑩ “조선의 활이요? 강하고 멋진…”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월 9일 14시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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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신미양요 흔적 뒤쫓아 강화도를 탐구한 미국인
●국궁(國弓)에 빠져 아예 한국역사 전공한 듀버네이 교수

영남대 국제학부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듀버네이 교수
영남대 국제학부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듀버네이 교수
"강화도에 몇 번이나 가봤냐고요? 글쎄요…, 셀 수가 없을 것 같아요."

개발공사로 땅이 파헤쳐지고 있는 강화도를 이곳저곳 누비는 미국인이 있다. 부동산에 관심을 지닌 인물이 아니다. 140여 년 전인 1871년 미국 아시아함대가 강화도를 쳐들어온 사건, 즉 신미양요(辛未 洋擾)의 흔적을 연구하는 토마스 듀버네이(Thomas Duvernay·51) 영남대 국제학부 교수다.

그는 지난 20년간 빠지지 않고 강화도를 방문해왔다. 한층 매서워진 바닷바람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몇 시간이고 땅을 뒤적거리다, 당시의 화약무기 흔적이 나오면 GPS에 위치를 기록하기를 반복한다.

"당시 미군과 조선군이 주둔한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지역들이 개발로 훼손되고 있어서 유물들을 수집하는 작업을 게을리 할 수 없어요."

■신미양요 연구 20여년… 문화재 반환 운동도


역사학자인 듀버네이 교수는 서구 열강이 한반도를 침탈하던 조선후기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그런데 그 계기가 극적이다. 어릴 적 미국에서 양궁을 접한 그는 1989년 한국에 정착한 이후 자연스레 국궁에 관심을 갖고 빠져든 것이다.

국궁을 알리기 위해 영문 홈페이지(www.koreanarchery.org)를 개설하고, 국궁에 대한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이 책은 전 세계적으로 수만 권이 팔릴 정도로 '우리나라 활'의 세계에 알린 수작으로 평가된다. 2004년에는 미국에서 국궁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받았을 정도니 그의 활에 대한 애정은 상상을 초월한다.

"조선의 각궁은 당시 세계적인 수준의 무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의 활에 대해 탐구해가면서 실제로 전쟁에선 어떻게 활이 영향력을 가졌을 지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면서 '신미양요'와 처음 만난 거지요."

'조선의 활'에 대한 애정과 미국인이라는 특수성이 '신미양요'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킨 것이다. 그렇게 그는 아시아와 미국의 만남의 산물인 '신미양요'를 전쟁사 측면에서 세심하게 접근해갔다. 미국인이기 때문에 혹시 미국의 편에서 역사를 서술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는 언제나 "보평 타당한 객관적 입장을 가지려 노력하는 게 역사학자의 의무"라고 설명한다.

연구를 하게 되면서 조선 후기역사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인식이 널리 퍼진 것에 대해 아쉬움을 갖고 연구를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신미양요 당시 조선군은 국궁 대신 조총을 무기로 사용했다는 것, 국궁은 갑오경장이 일어날 때까지 조선군 훈련용으로 주로 사용한 것. 특히 조선의 화약무기 체제는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세계적인 수준에서 절대로 뒤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활을 넘어 조선의 화학무기도 관심 집중…

연구를 하면 할수록 한국학의 매력에 빠졌다고 회고한다. 결국 연구를 시작한 지 20년만인 지난해 듀버네이 교수는 신미양요 당시 미군의 이동 경로를 구체적으로 연구한 논문 '조선에서의 1871년 US 진군로 조사'로 영남대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신미양요는 조선과 미국의 군대가 최초로 대면한 사건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아, 관련 연구도 부족한 상태입니다."

연구 과정에서 그는 문화재 반환 운동에 앞장서 2007년에는 신미양요 당시 미군에 빼앗겨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돼 있던 '어재연 장수기'를 되찾아 오기도 했다.

한국의 전통활을 연구한 책
한국의 전통활을 연구한 책
당시 듀버네이 교수는 어재연 장군의 장수기 반환을 위해 당시 현직에 있던 빌 클린턴 대통령과 후임인 조지 부시 대통령은 물론 퇴임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에게 수차례 장수기 반환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신미양요는 두 나라간의 공식적인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이 탈취해 간 것들이 전리품이라 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미국은 조선의 영토에 허락 없이 침입했기 때문에 문화재 반환은 상식적인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는 지난해 영남대가 처음 개설한 국제학부에서 한국의 역사 문화, 동아시아의 한국 등 한국을 주제로 강좌를 열었다. 한국을 배우러 온 외국인 학생들에겐 한국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한국인 재학생들에겐 보다 중립적 시각에서 한국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조선의 활'에서 시작한 그의 조선의 군사역사에 대한 관심은 이제 조선의 화약무기로 확장됐다. 그는 한국의 전장 화약 무기가 한국에만 있는 전통 무기였음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난 11월에는 복원된 조총, 화승총을 가지고 한국군사아카데미의 교수들에게 직접 사격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TV 사극에서도 종종 화약무기에 대한 사실을 왜곡해 사람들이 그릇된 정보를 갖게 하고 있습니다. 저는 한국인들에게 한국의 전통 화약 무기의 역사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려주고 싶습니다. 이건 분명 한국인들이 자랑스러워해야 할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 취미는 국궁, 관련 서적까지 펴내

조선활을 연구해온 토마스 듀버네이 교수
조선활을 연구해온 토마스 듀버네이 교수
그가 처음 한국 땅을 밟은 것은 23살이었던 1984년, 경주 문화고등학교에서 영어 원어민 교사로 1년을 근무했다. 당시 같은 학교에서 과학을 가르치던 여교사와 사랑에 빠진 그는 결혼을 하고, 한국과 미국을 오가다가 1989년 한국에 정착했다. 그리고 이후 줄곧 한국의 역사를 연구하고 그 문화를 세계로 전파하는 데 투신해 왔다.

듀버네이 교수는 앞으로도 한국의 역사를 '정확하게' 밝혀내기 위해 노력할 계획이다. 특히, 그는 국외 자료들의 역사적 오류들을 수정해 나가는 것만큼이나 국내 자료들의 오류도 점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이 아님에도 사실이라고 인정받는 경우나 충분한 정보가 없어 편향된 결론이 나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터뷰를 끝내려는 찰나 그의 자랑은 아들로 향했다. 듀버네이의 아들인 이요한(24) 씨는 2001년 초등학교 졸업 1년만인 14세에 대학에 합격한 재원이다. 고려대학교 대학원 언어학 박사과정을 졸업한 그는 가톨릭대학교 언어교육원에서 초빙교수로 교편을 잡았고, 현재도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어쩌다 재능을 키워주려고 보니 홈스쿨링을 통해 검정고시로 대학을 일찍 마치게 됐어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게 격려해 주었을 뿐이에요."

■ 아들 이요한 씨, 14세에 대학 합격한 락밴드 베이시스트

그는 최근 '바닐라 유니티'의 베이시스트(애칭 '닉') 활동으로 유명세를 구가중이다. 이 밴드는 데뷔부터 서태지 공연의 단독 게스트로 초청받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 씨는 폭발적인 베이스 연주의 비결로 '국궁으로 다진 팔 힘' 때문이라고 밝혀 화제를 모았다. 아버지인 듀버네이 교수가 6살 때부터 국궁을 가르친 덕분이라는 얘기다.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을 잘 아는 듀버네이 교수, 23살 처음 한국을 찾았던 그는 어느덧 50대가 됐다. 미국에서 보낸 시간보다 한국에서 지낸 세월이 더 길어졌다. 그가 이토록 한국을 사랑하는 이유는 비교적 명확해 보인다.

"제가 한국을 사랑하는 이유는 제 집이 있고, 반평생 이상을 이 곳에서 살아왔기 때문일 겁니다. 다른 한국인들 역시 저 이상으로 한국을 사랑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정호재 기자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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