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김광규]새해에 보고 싶은 ‘그리운 세상’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2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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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규 시인·한양대 명예교수
김광규 시인·한양대 명예교수
아침마다 우리는 밤에서 깨어난다. 어제 밤에서 깨어나 오늘을 새로 맞이한다. 동녘에서 솟아오르는 새 해를 바라보면 어제의 긴 그림자가 내 뒤에 놓여 있다. 30여 년 전에 살았던 ‘안개의 나라’, 삼색기(三色旗) 펄럭이던 그 시절에 쓴 졸시도 거기에 있다.

‘안개의 나라에서는 모두들/관리가 되려고 했다/관리가 되어 흑색 제복을 입고/권력을 갖고자 했다/마침내 모두들 관리가 되어버리자/세금을 낼 시민이 없었다/하는 수 없이 그들은/당직이나 숙직 근무를 하듯/윤번제로 시민 노릇을 하기로 했다.’

그곳에서는 안개가 너무 짙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귀로 들어야만 살 수 있다. 잘 듣기 위해서 토끼처럼 귀가 커진 사람들이 이 나라에 산다. 이곳에서 가장 선망 받는 직종은 ‘관리’다. 고위직으로 ‘특채’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관리가 되기 위해 각종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머리도 좋아야 하고, 시험공부도 필사적으로 해야 하고, 행운도 따라야 고시에 합격할 수 있다. 고시원 또는 고시텔이라는 혹독한 시험 준비 장소가 도처에 생겨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안개의 나라에서는 모두들/상인이 되려고 했다/상인이 되어 황색 제복을 입고/돈을 벌고자 했다/마침내 모두들 상인이 되어버리자/물건을 사 갈 고객이 없었다/하는 수 없이 그들은/조합장이나 번영회장을 뽑듯/고객을 선출하기로 했다.’

육탄전 벌이는 국회의원들 한심

이른바 근대화의 초석이었던 제조업이 쇠퇴하고 금융업이나 서비스업이 번성하게 된 것도 그간의 변화일 것이다. 좋은 제품을 생산 판매하는 노고를 기피하고, 곧장 돈 놓고 돈 버는 금융이나 주식 투자로 다투어 몰려들었다. 우리의 고전적 사고방식으로는 돈이 경제적 유통수단일 뿐인데, 이제는 자본 증식이 삶의 목표가 되고 말았다. 정권을 잡는 것이 큰돈을 버는 것과 동의어가 된 지 오래인 듯하다. ‘정경유착’도 널리 쓰이는 사자성어가 되었다.

‘안개의 나라에서는 모두들/군인이 되려고 했다/군인이 되어 녹색 제복을 입고/나라를 지키고자 했다/마침내 모두들 군인이 되어버리자/그들이 지켜줄 민간인이 없었다/하는 수 없이 그들은/불침번이나 초병 근무를 서듯/병력을 차출하여 민간인으로 복무하게 했다.’

말할 것도 없이 군인은 외침이나 내란으로부터 국가와 민족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인데, 우리나라에서는 30년 가까이 권력을 탈취하는 교두보로 사용되었다. 군사독재체제를 타도하고자 끈질기게 투쟁한 보람으로 군사정권이 민간 정부로 바뀌었고, 국민이 직접 대표자를 뽑는 의회민주주의가 정착 단계에 접어들었다. 지금도 공고한 마너키즘의 전체주의 족쇄를 벗어나지 못한 몇몇 나라들과 달리, 우리나라는 팔러멘터리즘의 선진국 대열에 끼게 되었다. 이제 ‘삼색기’를 내리고 민간인, 시민, 소비자가 직접 대표자를 선출하고, 상품을 선택하고, 군비를 규제하는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그러나 국회의원들이 의사당에서 연속극에 나오는 조폭들처럼 육탄전을 벌이는 광경을 보면 어쩌다가 저런 사람들을 국민의 대표로 선출했는지 한심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유와 정의의 기치를 높이 들고 국민의 지지와 신뢰를 한 몸에 모았던 인사들이 권력에 집착하며 타락하는 모습들도 우리를 슬프게 했다. 우리가 꿈꾸는 ‘그리운 세상’은 아직 요원한 것일까.

‘이 세상과 저 세상/사이에 아마도/그 세상이 있겠지/…/사람과 짐승이 같은 물을 나누어 마시고/쓸 만큼 돈을 벌어서/편리한 기계를 함께 부리며/모두가 사이좋게 어울려 살아가는 곳/…/그 세상 그리워/벌써 몇 번째인가/신중하게 투표권을 행사했건만/… 내가 찍은 후보는/번번이 ….’

인간이 만들어낸 정치체제 가운데 그나마 합리적인 모범답안이라고 일컫는 의회민주주의 제도에도 맹점은 있다. 능력 있고 청렴하고 양심적인 후보자가 떨어지고, 선거제도를 교묘하게 악용하는 직업 정치꾼이 계속 뽑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양대 선거에서 새 인물 등장 기대

국회의원도 연임제를 없애고, 임기를 다소 늘리더라도 단임제로 뽑는 것이 어떨까. 현행제도로 보면 한 번 당선된 의원이 재선되기 위해 비리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폐단을 예방하기 위하여 대통령도 단임제로 만들지 않았는가. 정말로 출중한 인물이라면 임기가 한 번 끝난 다음에 한 임기 동안 시민으로서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고, 그 다음 번에 다시 입후보할 기회를 주면 된다. 정치는 명예로운 비정규직이 되어야지, 권력이나 이권에 연연하는 출세의 방편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해마다 각 일간지의 신춘문예에 신인들의 새로운 작품들이 당선되듯 금년의 양대 선거에도 뉴 페이스가 많이 등장하여 그리운 세상 앞당겨주기를 기대해 본다.

김광규 시인·한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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