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 한줄]오늘을 사는 무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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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1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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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라.” -‘죽은 시인의 사회’(1989년) 중에서

《 “오늘을 살아라.”

-‘죽은 시인의 사회’(1989년) 중에서
흔하고 뻔하다. 현실과 동떨어진, 전설 같은 잠언. 이제는.

세월과 함께 은은한 광채를 덧입어 가는 영화가 있고, 뽀얗게 밝던 빛이 흐릿해지는 영화가 있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후자다.

이야기가 흔하고 뻔하거나 허황된 탓이 아니다. 1989년의 10대에게 닐과 토드, 찰리는 그대로 나와 내 옆자리 친구의 지구 반대편 거울 속 투상이었다.

22년이 흐른 지금, 깊은 밤 기숙사를 탈출해 촛불을 켜고 옹기종기 동굴에 모여 앉아 자작시를 낭송하는 청춘 군상은, 이 행성 어느 구석에서도 실체를 기대하기 어렵다.

지금이 예전보다 못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냥 그렇게 된 거다. 동화나 전설 속 허구가 한때는 당연한 현실이었듯. 소리 없이 노래하는 작은 새가 가슴 속 어딘가에 산다고 믿었던 자신이 한때 존재했다는 사실을 이제는 믿을 수 없게 되었듯.

아버지의 반대로 연극배우의 꿈을 버려야 한다는 절망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소년. 친구를 잃은 슬픔에 목 놓아 울며 앞뒤 없이 새하얀 눈밭을 내달리는 소년. 완고한 관습에 등 떠밀려 학교를 떠나게 된 선생을 배웅하기 위해 책상 위로 뛰어올라 “오 캡틴 마이 캡틴”을 외치는 소년들. 하나같이 이제는 모두, 상상조차 낯간지러운 옛날 옛날의 얘기다.

백년쯤 뒤에야 서른 살이 될 것처럼 남은 날의 용량을 뻔뻔하게 과신했던 10대 때, 키팅 선생의 유명한 조언은 사실 공허하게 들렸다.

내일을 생각하고 뛰어야 젊음이지, 무슨 그런 소박하고 맥 빠지는 영감 같은 소리를. 그랬다.

22년이 지나고 나서 “오늘을 살아라”는 말에 대해 하게 된 대답은 “무슨 그런 거창한 소리를”이다.

눈앞의 시간은 언제나 믿어지지 않는 속도로 멀찌감치 도망가 화석으로 굳어버린다. 경험치를 아무리 쌓아도 그 속도는 조절이 어렵다. 오히려 경험치에 비례해서 더 정신없이 빨라진다.

어제나 내일에 대해 생각하는 것보다 오늘에 집중하는 것이 더 나은 삶의 방식이라는 판단에 의지함이 아니다. 즐기거나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저 견디고 살아남는 거다. 어쨌거나 하루를 정신없이 버텨낸 스스로를 대견해하며 잠들고 다시 잠들기.

카르페 디엠.

키팅의 메시지는 멋지고 충격적이었지만 10대 후반의 청춘들에게 버겁고 무서운 폭언이었다. 연극배우의 꿈을 어설프게 품었던 닐이 덜컥 자살한 것은 어쩌면 그저, 힘들여 배우가 돼봤자 미치광이 천재 닥터 하우스의 좋은 친구 역할에 그칠 자신의 그릇을 너무 일찍 확인했기 때문이었을지도.

어쨌든 살아남고 싶은 마음에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른다. 한 발 한 발 겨우겨우 짚어나갈수록 천재 검사 미야모토 무사시나 사사키 고지로는커녕 새파란 객기에 칼을 차고 만 얼치기에 지나지 않음을 하루하루 확인해 간다.

‘좋은 투수’ 키네가 아무리 열심히 공을 던져도 ‘천재 투수’ 히로가 될 수는 없다.(‘H2’)

그렇다고, 그만 던질 텐가.

좋아하는 거다 그냥. 던지는 것을.

언제나 마지막 일검(一劍). 다음은 없다.(‘배가본드’)

살아남으려면.

krag 동아일보 기자 krag06@gmail.com  

krag
동아일보 기자. 조각가 음악가 의사를 꿈꾸다가 뜬금없이 건축을 공부한 뒤 글 쓰며 밥 벌어 살고 있다. 삶은 홀로 무자맥질. 취미는 가사노동. 음악과 영화 덕에 그래도 가끔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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