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진기를 들고]자식들에게 ‘수술비’ 말 꺼내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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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1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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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뇨합병증 70대 할아버지의 고뇌

얼마 전 발에 당뇨합병증이 발생한 70대 김모 할아버지가 진료실을 찾아왔다. 왼발은 관리가 잘 안돼 발가락 부분의 피부 괴사와 궤양이 심각한 수준이었다. 안타깝지만 수술을 통해 발가락 하나와 피부 일부를 제거해야 했다. 당뇨환자는 다리 동맥이 좁아져 혈액 순환이 잘 안돼 신경까지 손상되는 데다 면역기능이 떨어져 발부위에 상처가 쉽게 나고, 잘 낫지도 않는다.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하자 할아버지는 많이 주저했다. 수술이 겁나시나보다 생각하며 “발의 성한 부분이라도 보존하시려면 꼭 수술을 받으셔야 한다”고 다시 설득했지만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한참 만에 주저하며 입을 뗀 김 할아버지는 의외의 말을 꺼냈다.

“수술받는 것이 무서운 게 아니라, 자식들에게 짐이 되는 게 무섭습니다.”

김 할아버지는 20여 년간 당뇨를 앓아왔다. 그러다 보니 심장이며 콩팥 등에 크고 작은 합병증이 생겨 여러 번 병원 신세를 졌다. 직장을 퇴직한 후에는 마땅한 수입이 없고 모아둔 돈도 없어서 지금껏 자식들이 병원비를 부담해 왔다고 한다. 여기에 다시 이번 수술비까지 얘기를 꺼내야 하니 할아버지로서는 자식들 볼 염치가 없다는 것이다.

진료실을 찾는 환자나 가족들도 김 할아버지의 진료비 걱정에 동감하고 있다. 특히 진료비를 정부에서 100% 가까이 지원받는 저소득층보다 형편이 조금 나은 환자들이 진료비 때문에 고생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얼마 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65세 이상 고령층의 1인당 의료비가 276만 원이었다. 2005년 154만 원에 비해 79.1% 늘었다. 사회 경제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건강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수명도 대폭 늘고 있다. 과거에는 불치병으로 여겨지던 암조차 조금씩 정복할 만큼 의술이 발달하고 있다. 최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연세암센터의 조사결과를 보면 10년 이상 생존하는 암 환자 비율은 전체 암 환자의 51.1%라고 하니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도 환자들의 진료비 걱정은 줄어들지 않으니 그냥 넘길 문제가 아니다.

이진우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정형외과 교수
이진우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정형외과 교수
오래 사는 것은 굳이 진시황제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꿈꾸는 축복일 것이다. 그런데 장수(長壽)가 축복이기는커녕 집안의 걱정거리가 되는 것은 슬픈 일이다. 김 할아버지처럼 만성질환에 시달리는 노인들은 늘어나는 의료비에 고통을 겪고, 정부 역시 건강보험 재정 악화로 곤란한 지경이다. 현재의 출산율과 노인 정책으로는 이런 문제가 점점 더 심각해질 것이다.

김 할아버지의 모습은 한평생 자식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하면서 변변한 노후 준비도 못한 전형적인 베이비부머 세대인 우리 아버지, 어머니의 현실일 것이다. 할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진료실을 나가는 김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말로 표현 못할 씁쓸함을 느꼈다.

이진우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정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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