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전에 이것만은…/강신주]라흐마니노프를 칠 거다, 하루에 한 소절씩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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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1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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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없는 집에 살던 내게 친구 누나의 연주가 준 충격
지금도 키보드 보면 건반 생각…도전해야지, 그 ‘철인3종’에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1960년대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당시 피아노가 무엇을 의미했는가를. 남루했던 시절, 피아노는 부유함의 상징이었다. 피아노가 있는 집과 없는 집, 뭐 이렇게 구별해도 좋을 것 같다. 피아노를 장식품으로만 여겼던 집도 있었다. 피아노는 급하게 구했지만 아름다운 선율로 연주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급하게 이루어질 수는 없는 법이니까.

친구의 집에 갔을 때 난생처음 피아노를 보고 매우 부러워하던 때가 있었다. 다행히 친구는 피아노를 그다지 잘 치지 못해 내 자존심은 조금이나마 회복되었다. 친구의 방에서 그와 이야기하던 중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이 내 귓가에 찾아들었다. 당시 음대를 다닌다던 친구의 첫째 누나가 거실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무엇인가에 홀린 듯이 거실로 나갔다. 쇼팽의 녹턴 20번이라고 누나는 내게 친절히도 일러주었다.

강신주 철학자
강신주 철학자
누나는 나와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 같았다. 쇼팽의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환하게 웃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친구의 누나 때문인지, 아니면 쇼팽의 연주 때문인지 아리송하지만 당시 나는 너무나 피아노를 갖고 싶었다. 그리고 멋들어지게 피아노를 연주하고 싶었다. 그러나 언감생심! 가난한 살림에 부업을 마다하지 않는 어머니에게 입도 벙긋 못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대학시절 학교에는 클래식 감상실이 있었다. 민주화운동 열기로 뜨거웠던 학교생활의 유일한 쉼터는 바로 그곳이었다. 세 명은 족히 앉을 수 있는 푹신하고 커다란 의자가 컴컴한 감상실 안에 10여 개 있었다. 대개의 경우 학생들이 자주 찾지 않아 한적한 편이어서 나는 아예 의자에 드러누워 음악을 듣거나 잠을 청하곤 하였다.

잠에 취해 있다가 갑자기 눈이 번쩍 뜨였다.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 강력한 피아노 연주가 나를 깨운 것이다. 무엇엔가 홀린 듯이 음악에 몰입했다. 감상실을 떠나면서 문 앞에 놓여있던 칠판을 보았다. 절망에서부터 희망으로, 혹은 희망에서부터 절망으로 내 마음을 완전히 휘저어 버린 곡의 정체를 알았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었다.

레코드 가게를 나온 내 손에는 라흐마니노프 음반이 한 장 들려 있었다. 서둘러 집에 들어온 나는 헤드폰을 끼고 다시 라흐마니노프를 들었다. 나는 낭떠러지에서 계곡으로 곤두박질친다. 계곡은 너무나 깊어 얼마나 떨어져야 바닥에 이를지 모른다. 1악장은 그렇게 시작되었지만 2악장과 3악장에 이르러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마침내 나는 하늘로 비상하게 된다.

아, 다시 피아노를 갖고 싶었다. 직접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절망하고 말았다. 피아노를 좀 치는 친구에게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하고 싶다는 뜻을 피력하자 그는 100m를 뛰고 헐떡거리는 사람이 철인3종 경기에 도전하는 것이란다. 친구는 라흐마니노프가 자신도 근접하기 힘든 유명한 피아노의 비르투오소, 즉 연주 실력이 매우 뛰어난 대가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피아노를 치지 못하지만 나는 아직도 라흐마니노프를 듣는다. 강연하러 가는 기차 안에서도 듣고, 그리고 강연이 끝난 뒤 지친 몸을 달래려고 듣는다. 그의 피아노 협주곡은 내 MP3플레이어의 베스트 오브 베스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새로운 연주자의 연주를 들을 때마다 나는 다시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인문저자로서 나는 피아노보다는 컴퓨터 키보드에 익숙하다. 하지만 아직도 키보드만 보면 자꾸 피아노 건반이 떠오른다. 가끔 라흐마니노프의 강렬한 도입부를 흉내 내며 키보드를 쳐보기도 한다. 조만간 작은 피아노를 한 대 구입할 생각이다. 다 필요 없다. 악보는 어느 정도 볼 수 있으니 라흐마니노프를 들으며 손가락 하나하나로 라흐마니노프를 쳐 볼 생각이다. 하루에 한 소절씩, 죽기 전에 아마 전체 3악장 중 1악장은 완성할 수 있겠지.

강신주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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