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성 전문기자의 아하, 육상!]<6> 몸싸움 치열한 중거리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8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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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 위의 격투기’ 800m-1500m

198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여자 3000m 결승에서 졸라 버드(오른쪽)와 메리 데커의 발이 서로 엉켜 데커가 넘어지고 있다. 동아일보DB
198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여자 3000m 결승에서 졸라 버드(오른쪽)와 메리 데커의 발이 서로 엉켜 데커가 넘어지고 있다. 동아일보DB
중거리인 남녀 800m, 1500m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 번째 특징은 짐작하기 쉽다. 단거리의 스피드와 장거리의 지구력이 동시에 요구된다는 것. 따라서 울퉁불퉁한 찐빵근육(단거리 속근)과 깡말랐지만 속이 꽉 찬 참나무근육(장거리 지근)이 골고루 섞여 있어야 된다.

두 번째 특징은 육상 종목 중 유일하게 몸싸움을 한다는 것이다. 중거리는 사실상 오픈 코스이기 때문이다. 100m, 200m, 400m 단거리 경기는 자신의 주로(走路)에서만 달려야 하는 세퍼레이트(Separate) 코스다. 1.22m 폭의 자기 레인을 벗어나면 실격이다. 반면 800m는 출발선 120m 지점부터는 오픈 코스이다. 거기까지만 자기 레인을 따라 달리면 된다. 1500m는 아예 출발부터 오픈 코스다. 모든 선수들은 출발하자마자 우르르 1레인으로 몰려든다.

결국 800m, 1500m 레이스는 빙상의 쇼트트랙처럼 사실상의 몸싸움을 해야 한다. 추월은 오른쪽으로만 가능하다. 왼쪽으로 추월하면 실격이다. 선두주자가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교묘하게 몸으로 견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진짜 신체접촉을 하거나 다른 선수의 추월을 고의로 방해하면 실격이다. ‘접촉 없는 몸싸움’으로 치열한 신경전을 펼쳐야 한다. 몸만 안 닿았지 격투기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한편 장거리인 5000m 이상은 지구력 경기이기 때문에 몸싸움을 할 이유가 아예 없다. 던지기, 높이뛰기 등 다른 종목도 마찬가지다.

몸싸움이 있다 보니 선수들 간의 신경전도 팽팽하다. 1980년대 ‘맨발의 소녀’ 남아공의 졸라 버드(44)와 미국 메리 데커(52)의 레이스를 살펴보자. 데커는 그 시대 세계 중장거리 여왕이었다. 하지만 17세 소녀 버드가 데커의 1500m, 3000m 세계기록을 단숨에 깨버리며 혜성같이 등장했다(여자 3000m는 1995년 예테보리 세계선수권과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부터 5000m로 대체됐다).

1984년 8월 11일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여자 3000m 선수 대기실. 당시 스물다섯의 데커와 열일곱 소녀 버드가 마주쳤다. 버드는 남아공 출신이지만 영국 대표로 나왔다. 데커가 버드를 노려보며 말했다. “누구든지 내 발뒤꿈치를 건드리기만 하면 죽여 버릴거야.” 버드는 코웃음 쳤다. “난 항상 앞서 달리니까 네 발뒤꿈치 같은 건 건드릴 틈도 없을걸.”

경기가 시작됐다. 둘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1700m 정도 달렸을까. 버드가 1레인과 2레인 사이에서 1위, 데커가 1레인 안쪽에서 2위로 달리고 있었다. 버드가 데커 오른쪽에서 약간 앞서갔지만 그 거리는 한 뼘이 채 되지 않았다. 그 순간 버드가 피치를 올리며 1레인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뒤따르던 데커의 진로를 슬쩍 막아선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순간 둘이 엉키는가 싶더니 데커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버드도 그 충격에 잠시 비틀거리다가 간신히 균형을 찾은 후 7위로 완주했다. 심판은 버드의 진로 방해로 판정해 실격을 선언했다.

미국 언론은 격분했다. “버드가 전적으로 잘못했다”며 연일 성토했다. 훗날 버드는 “당시 나는 오사마 빈라덴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회고할 정도였다. 영국이라고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미국이 너무 데커만 싸고돈다”며 국제스포츠중재소에 제소했다. 최종 판정은 ‘데커의 개인적인 부주의’로 결정 났다. 버드의 기록도 인정됐다.

800m는 ‘격투기 중의 격투기’이다. 하지만 기록의 무덤이다. 남녀 통틀어 12번의 세계대회 동안 세계신기록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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