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들의 사진사랑 이야기]<18>김주원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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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8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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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무대뒤에 감춰진 발레리나의 애환 담고 싶어요

오랜 연습으로 신발 코는 검게 번들거리고 실밥이 너덜거리는 토슈즈 한 켤레. 거기에는 발레리나의 열정을 느낄 수 있는 땀 냄새가 가득하다. 2011. 김주원 촬영.
오랜 연습으로 신발 코는 검게 번들거리고 실밥이 너덜거리는 토슈즈 한 켤레. 거기에는 발레리나의 열정을 느낄 수 있는 땀 냄새가 가득하다. 2011. 김주원 촬영.
김주원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김주원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발끝에 힘을 모은다. 온 힘을 다해 날아오른다. 한 마리 새가 된다. 이런 발레의 모습은 환상 그 자체다. 하지만 대지에 못을 박듯이 체중을 발끝에 실어보라. 금방 발레는 아무나 추는 춤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발레리나는 온몸으로 표현하기에 적절한 긴팔과 다리 같은 신체조건은 기본이고 화려한 비상을 위해 더한 준비가 필요하다. 자유자재로 발끝에 몸을 의지하기 위한 각고의 훈련이 그것이다. 발끝에 굳은살이 늘어나고 뼈마디가 구부러지고 인대가 파열되는 일이 빈번하다. 이런 것을 이겨내야 발레리나가 된다. 이런 가운데서 빼어난 무용수가 되려면 자질 외에 남다른 인고의 세월이 필요함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런 인고의 세월을 거쳐 탄생한 발레리나가 있다. ‘날카로운 턱 선에서 이어지는 어깨선이 가장 아름다운, 풍부한 감성과 표정 연기로 관객들을 신비의 세계로 빠져들게 만드는 한국 발레계의 대표적인 프리마돈나.’ 바로 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 발레리나 김주원 씨(34)다. 요즘 춤밖에 모르던 그녀가 사진 찍기에 빠졌다기에 무슨 일인가 싶었다. 발레리나니깐 여러 사진가들의 모델이 되긴 하겠지만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의외였기 때문이다. ‘무슨 사진을 찍을까’도 궁금했다.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만나 사진과 관련된 이런저런 얘기를 들었다.

요즘 직업이 몇 개인지 궁금하다.

“생각하시는 것보다 많지 않아요. 대학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일 외엔 늘 연습실에 있어요. 광고모델은 일이 있을 때만 하는 것이고 TV의 춤 프로그램 심사위원을 하는 정도가 전부입니다. 꾸준히 대중 매체에 노출되다 보니 활동이 많아 보일 뿐이죠.”

사진엔 언제부터 관심을 갖기 시작했나요.

“사실 사진을 잘 몰라요.”(웃음)

그럼 ‘사진 찍는다’는 것은 잘못된 소문인가요.

“그렇지는 않아요. 발레는 그 모습이 아름다워서 많은 사진가들의 주목을 받아요. 나는 많은 사진가들과 작업을 해봤고 사진에 찍히는 것도 익숙해요. 반면에 사진을 찍는 수준은 고작 동료들과 기념사진을 찍거나 좋아하는 조카들 모습을 찍으면서 ‘너무 귀엽게 잘 나왔다’하는 수준이라 감히 ‘찍는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죠.”

그래도 잘 찍을 것 같다.


“전 발레리나잖아요. 사진에 관해 전문가일 거라고 기대는 하지 말았으면 해요. 국립발레단 단원은 예술가이지만 공무원이니 공연이 없을 때면 연습이 우선이고요. 사진은 찍고 싶을 때만 찍는 취미잖아요.”

본인만이 즐기는 사진 세계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혼자 조용히 잘 움직이는 편이에요. 국립발레단 일은 보통 오전 11시부터 시작하는데 저는 9시면 나와요. 삼십 분 정도 커피를 마시며 하루 일정을 체크해요. 그리곤 예술의 전당의 한구석에서 책을 읽거나 제가 공연할 작품의 음악을 들어요. 그러다 예쁜 풍경이 보이면 사진을 찍곤 해요. 밖에 거의 나돌아 다니지 않으니 예술의 전당의 갖가지 모습이 좋은 사진거리가 되죠. 해외 공연 가서는 시간이 날 때마다 사진을 많이 찍는 편이에요. 푸른 하늘이나 비 오는 모습 등 멋진 이국의 풍경을 보면 저절로 카메라에 손이 가요. 그리고 저도 모르게 진지해져요.”

(본인이 수준급 사진가로 비치는 게 무척 부담스러웠나 보다. 기자의 기대치를 한껏 떨어뜨린 다음, 자신이 준비한 사진에 관한 이야기보따리를 조금씩 풀어 놓는다.)

“사실 오래되지 않아 밝히고 싶지 않았는데 제가 발레사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늘 발레를 하며 사니까 발레와 관련된 사진은 부담 없이 찍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찍히는 사람도 동료나 선후배들이니 사진을 찍어도 뭐라고 하지 않을 것 같고요. 제가 사진 찍기로 치면 초보 중에 초보지만 발레에 대해선 좀 알잖아요. 딴 분야도 그렇지만 사진도 아는 만큼 보인다면서요. 사진전문가들처럼 발레를 작품으로 찍기보다는 발레 하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발레사진은 찍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기록도 되고 재미도 있잖아요.”

그런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우선 발레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죠. 드가의 ‘발레하는 소녀’를 떠올리면 쉬울 것 같고요. 구체적으론 연습실에서 땀 흘리며 연습하는 모습, 남들이 모르는 발레리나의 애환,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신체구조 따위를 찍는 거죠. 이런 부분은 유명 사진가도 잘 모르는 부분이에요. 발레라는 환상 뒤에 숨겨진 인간적인 모습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기술적으로도 발레를 하는 사람이 가장 잘 알 수 있는 중요한 과정이나 순간이 있어요. 발레리나는 뒤돌아서서 어깨로 슬픔을 표현해야 할 때도 있고 손가락 하나로 환희를 표현해야 할 때가 있어요. 발동작 하나로 눈물을 표현하기도 해요. 그런 발레적인 부분을 잘 잡아내는 사진가는 거의 없지요.”

작업한 지 얼마나 되었나요.

“이제 막 발을 뗀 단계라 얼마라고 얘기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래서 늦게 얘길 꺼냈고. 앞으로 기대해 주시면 안 될까요?(웃음) 최근엔 동료 무용수들이 쉴 때나 무대 뒤의 모습을 찍고 있어요. 또 무용수마다 신체조건이 다르니까 그 사람의 특징적인 부분을 잡아내 찍고자 해요. 발, 어깨 같은 특정 부위를 찍는 것이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신인에게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하면 더 많은 감동이 느껴져요.”

사진을 하면서 어려운 점이 있다면….

“지금까진 동료 후배들과 수다도 떨면서 부담 없이 친밀하게 지내면 됐잖아요. 하지만 이제는 제가 생각하는 바대로 사진을 찍어야겠다고 생각하니 상대에게 포즈를 부탁하게 돼요. 그런게 부담스럽고 제가 의도한 대로 사진이 잘 나오지 않으면 또 여러 번 찍게 되니 그것도 힘들어요. 예전에 사진작가 분들과 같이 작업할 때 무슨 사진을 저리 많이 찍을까 의문이 든 적이 있었어요. 이제 제가 찍어 보니 이해가 가더라고요.”

여러 사진가의 모델이 되어 작업하셨는데….

“발레뿐 아니라 춤을 추는 사람들은 사진가들과 작업을 많이 해요. 외국은 더 많아요. 제가 사진가들과 하는 작업은 주로 스튜디오 같은 특정 공간에서 연출된 모습을 찍어요. 그런 사진들은 제가 생각했던 제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일 때가 많아요. 거기서 새로운 발레적 영감을 얻기도 해요. 그래서 다른 분야의 예술가들과 교감이 필요한지도 모르겠어요. 이와는 별개지만 발레는 공연이 끝나고 나면 흔적이 없잖아요. 그래서 발레 공연은 누군가가 기록을 해야만 할 것 같아요. 그래야 역사로 흔적이 남게 되잖아요.”

사진과 발레의 연관성은 본인만이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발레가 안무가나 연출가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 속에서 제가 춤을 춘다면 사진은 사진작가에 의해 연출되어 또 다른 김주원이 만들어지잖아요. 연출은 같지만 결과는 전자는 발레 그 자체고, 후자는 사진예술 그 자체입니다. 저는 매개체일 뿐인데 사진을 통하면 발레가 새롭게 해석되는 것이죠.”

광고 모델로 자주 나섰는데 일반 모델의 몸매와 발레리나의 몸매는 어떻게 다른가요.


“둘 다 균형 잡힌 몸매나 긴 팔다리에서는 비슷해요. 단 일반 모델이 신이 주신 몸매라면 발레는 신이 주신 몸매를 발레에 맞게 뼈와 근육을 바꿔야 하는 예술입니다. 그래서 시작하는 시기도 중요하고 하루하루 꾸준히 연습을 해나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주로 쓰는 카메라가 뭔가요.

“얼마 전 ‘사진 열심히 찍으라’며 아시는 분이 올림푸스 카메라 ‘펜’을 선물해 주셨어요. 질도 좋고 가지고 다니기 편해요. 아직 익숙해지지는 않았지만 열심히 하라는 동기 부여는 된 것 같아요. 확실히 발레사진이 좀 더 세련되게 찍힌다는 느낌도 들고요.”

(유명 발레리나와의 인터뷰였던 만큼 얘기가 자연스럽게 발레에 관한 얘기로 흘러간다. 발레에 대해 문외한인 기자의 뜬금없는 질문이다.)

2011년에 발레 열풍이 부는 게 맞나요.


“올해 국립발레단이 올린 ‘지젤’이 50년 발레단 역사상 처음으로 전회, 전석 매진을 기록했어요. 또 영화 블랙스완이 150만 관객을 동원했고 피겨여왕 김연아도 발레곡 지젤로 1위 수상을 했잖아요. 이런 외적 현상 말고도 실제로도 한국발레는 요즘 뜨고 있어요. 한국 무용수들의 실력은 세계적이에요. 국립발레단만 봐도 솔리스트 이상은 국제무대에서 금상이나 그랑프리를 받은 사람들이에요. 러시아나 유럽의 발레 스타들도 이제 한국에서 함께 공연하기를 원해요.”

발레리나에게도 정년이 있나요.

“유럽은 40∼45세로 정년이 정해진 곳도 있어요. 우리는 그쪽보다 조금 빠른 느낌이고요. 기초를 다질 수 있는 발레학교가 없어서 특히 그런 것 같아요. 저는 아직 정년을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육체적 능력이 닿는 데까지가 정년이고 그건 제 몸이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정년 후에 발레전문 사진작가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나요.

“만일 정년 후에도 발레계에 계속 몸담는다면 발레의 다양한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요. 하지만 발레전문 사진작가까지는 아직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개그 프로그램에서 ‘발레리노’란 코너가 인기입니다. 발레복이 타이트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면….

‘백조의 호수’ 드레스 리허설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무용수들.예술의 전당. 2011
‘백조의 호수’ 드레스 리허설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무용수들.예술의 전당. 2011
“오늘날의 발레복은 왕실이나 귀족들이 입던 옷에서 발전한 것입니다. 발레복이 더욱 얇아지고 치마는 점점 짧아지면서 신체의 굴곡이 더욱 드러난 거예요. 발레는 인간의 몸으로 가장 아름답고 긴 라인으로 표현하는 예술입니다. 몸의 라인이 보이지 않으면 표현 자체가 불가능해요.

발레 애호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일단 와서 보셔야 돼요. 발레는 춤 음악 미술 분장 조명 등이 함께 어우러진 종합예술인 만큼 총체적으로 감동을 받으실 겁니다. 물론 때로는 아무 소리도 없는 몸짓에서 더 진한 감동을 느낄 수도 있고요.”

발레리나 김주원은 툭하면 커피 물을 쏟는다. 김치 볶음밥을 만드는 데 2시간이 걸린다. 운전면허 6번 낙방에 결국 운전면허를 취득을 포기했다. 이렇게 일상에선 한없이 어설퍼 보이는 그녀지만 발레만큼은 아니다. 최고가 되기 위한 어떤 도전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끊임없는 연습 탓에 수시로 몸에는 멍 자국이 생긴다. 작년 뮤지컬 ‘컨택트’ 공연에선 7∼8cm 하이힐을 신고 춤추다 왼쪽 허벅지의 근막이 파열되기도 했다. 하지만 부상조차 두려워하지 않는다. 여러 장르에 발레를 접목하는 시도도 멈추지 않는다.

오랜 세월 발레를 한 김주원에게 사진 찍기는 이제 막 관심을 가진 걸음마 수준일지 모른다. 하지만 과정을 중시하고 매순간 최선을 다하는 그녀의 성격으로 볼 때 다큐멘터리 성격의 기록사진이 됐건 예술사진이 됐건 조만간 ‘김주원 표 발레사진’이 나오리란 확신이 든다.

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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