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혁 전문기자의 세상이야기]요트로 세계일주 단독 항해중인 ‘윤태근’ 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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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2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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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둘까, 돌아갈까’… 그렇게 견디다보면 순풍이 조금씩 배를 밀었다

윤태근 선장이 우슈아이아 도착 직전 동영상을 통해 그의 항해를 응원하는 국내 요티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칠레 네코체아에 정박 중인 인트레피드호. 윤태근 선장 제공
윤태근 선장이 우슈아이아 도착 직전 동영상을 통해 그의 항해를 응원하는 국내 요티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칠레 네코체아에 정박 중인 인트레피드호. 윤태근 선장 제공
친구들은 그녀를 만나면 이런 말부터 던진다.

“너거 신랑 아직도 안 돌아왔나? 오면 ‘내 인생 돌리도’라 케라.”

2009년 10월 11일 ‘1년 예정’으로 떠났으니 계획대로라면 벌써 돌아와 있어야 했다. 생활비도 바닥이 나 그녀는 얼마 전부터 다시 기간제 임시교사로 뛰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이 다음 카페(cafe.daum.net/yoontaegeun)에 올리는 항해기를 볼 때마다 자랑스럽다. “남아메리카 맨 끝, 칠레 골짜기 항구에 한국 요트가 간 적이 있습니까? 한국 국기가 한 번도 걸린 적이 없던 곳에 태극기를 건다는 생각을 하면 뭐랄까 국위 선양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뿌듯합니다. 무엇보다 아이들도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하고….”

자기 생일날, 37피트짜리 크루즈항해용 요트(인트레피드호)로 한국 최초의 세계일주 단독항해를 시작한 요티(요트인) 윤태근 선장(49). 이제 내일이면 칠레 남부 발디비아에 닿는다. 그가 태평양 횡단 기점으로 잡은 곳이다. 그러니까 이제 부산에서 출발해 인도양과 대서양을 지나 남아메리카 대륙의 맨 끝까지 내려갔다 올라온 윤 선장의 세계일주 항해도 본격 하산 길에 들어서는 셈이다.

발디비아에서 부산까지는 대략 1만 마일, 1만8500km쯤 된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다. 태평양이라는 이름 그대로 거칠 것이 없기 때문에 그의 말대로 그냥 항해만 하면 된다. 지금까지는 그렇지 않았다.

“내 몸을 엑스레이로 찍을 수 있다면 시커멓게 타 있을 것이다.”

지난해 11월 9일 브라질 피녜이라 해안 부근의 묘박지(anchoring basin)에 정박할 때를 떠올리면 시커멓게 타고 남은 숯검댕이 됐을 거란 생각뿐이다.

“한밤중에 느낌이 이상해서 일어났다.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을 보니 속도가 1노트였다. 닻이 끌리고 있었다. 얼른 선실 밖으로 나갔다. 어두워서 어디가 어딘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배가 북풍에 밀려 남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는데, 바로 앞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파도가 하얗게 일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검은 암초였다. 거리는 불과 10m도 되지 않았다. 이것저것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배에 시동을 걸고 40m쯤 떨어진 곳으로 나왔다. 남은 앵커 체인을 모두 풀어줬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오전 4시. 날이 밝으려면 2시간은 더 기다려야 한다. ‘뭐가 문제였나?’ 곰곰이 생각해봤다. 정말이지 천운이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배는 암초와 부딪쳤을 것이고, 항해는 여기서 끝날 뻔했다.”

그러나 ‘지독한 하루’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계속 닻이 흘러가는지 지켜보며 아침이 오기를 기다렸다. 처음엔 20m 거리를 가는 데 몇 분 정도 걸리더니 파도가 높아지고 수심이 깊어지면서 점점 빨라졌다. 인트레피드호의 육중한 바우(bow·뱃머리)가 끊임없이 위로 솟았다가 아래로 처박으며 파도를 갈랐다. 앵커 체인에 밧줄을 연결해 닻줄을 더 길게 늘여야 했다. 그러나 11t이나 되는 배의 압력 때문에 고리를 벗겨낼 수 없었다. 결국 비상용 칼로 줄을 끊었다. 밧줄은 빠른 속도로 풀려나갔다. 나는 얼른 뒤로 물러섰다. ‘밧줄에 발목이라도 감기는 날엔 정말!’ 그 와중에도 배는 다시 남쪽 암초지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부산 수영만 요트계류장에서 출발해 일본 규슈∼오키나와∼홍콩∼필리핀 수비크 만∼몰디브∼오만 살랄라∼수에즈 운하∼지브롤터 해협∼아르헨티나 마르델플라타∼남미 대륙 최남단 우슈아이아∼칠레 푸에르토윌리암스를 거치는 동안 바다는 잠시도 그를 놔두지 않았다. 항해자금까지 바닥났다. 그는 태평양을 눈앞에 두고 세계일주 단독 항해 포기를 결심한다. ‘그래, 1년만 몸을 추스르고 자금을 더 모아 다시 오자.’

항해 도중 수없이 ‘돌아갈까, 돌아갈까’를 되뇌다 말곤 했지만 이번은 넘기기 어려울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아내와 긴 대화를 나눴다. 아내는 “집은 어떻게든 꾸려갈 테니 할 수 있으면 항해를 마치는 게 좋겠다”고 했다. 아내는 어쩌면 똑같은 마음고생을 다시 하지 않았으면 했는지 모른다.

기자가 위성전화로 윤 선장을 찾은 것은 그가 마음을 다잡은 직후였다. 칠레 시간으로 11일 오후 8시쯤 카레타 만의 라첼이라는 곳에서 묘박 중이었다. 그리고 17, 20일 다시 통화했다.

―솔직히 한번 물어보자. 뭘 위해서 그렇게 항해를 하는 것인가.

“잘 모르겠다. 한국에 도착하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떤 때는 기(氣)가 충만해 있다가도, 힘들고 그러면 ‘나이 50에 한 집안의 가장이 이게 뭐하는 짓인가’ ‘이게 정말 값어치 있는 일인가’ 하고 자문하게 된다.”

―지금 하고 있는 항해가 ‘윤태근 개인의 도전’ 그 이상의 의미가 있나.


“우리나라가 등산이나 사이클처럼 육지에서의 도전은 세계에 내놓을 만한 것이 많지만 바다에 도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삼면이 바다인데 대륙문명의 영향 탓인지 어릴 때부터 ‘물가에 가지 마라’는 소리만 듣는다. 한국인으로, 한국에서 처음으로 세계 일주 단독 항해를 시작한 것이다. 내 뒤로도 도전하는 사람이 이어지면 좋겠다.”

―지금 인트레피드호의 상태는 어떤가.

“괜찮다. 혼자서 하기 때문에 장비가 좋아야 하긴 하지만…. 태평양은 항해만 하니까 괜찮다. 사실 두 사람만 돼도 항해하기 괜찮다. 그러나 혼자서 하면 배를 수리하거나 작업하는 사이에 요트가 흘러가 버린다. 지금까지 혼자 항해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태평양은 어떨 것 같나.

“1만8500km를 1시간에 5노트씩 가면 3개월 걸린다. 6월부터 시작되는 태풍에 발이 묶이지 않으려면 지금 태평양을 횡단해야 한다. 그래도 태평양엔 아무것도 없어서 그냥 흘러가면 된다.”

―그래도 프랑스의 전설적 세일러인 올리비에 드 케르소종은 태평양에 대해 ‘인도양처럼 항해인들을 박해하는 바다는 아니지만 40년 동안 힘들었던 경험이 적지 않았던 바다’라고 했다. 그는 특히 일본의 판화를 인용해 태평양을 표현했는데, 해류의 영향으로 ‘깡통 이빨’처럼 뾰족한 파도를 만들어내는 성마른 바다라고 했다.

“인도양, 대서양은 건너는 시기를 잘 맞춰야 한다. 태평양은 괜찮다. 파도가 3m라도 그냥 뒤뚱거리며 건너면 된다. 물론 자연을 거스르면 힘들지만….”

―겁나지 않나. 바다는 보고만 있어도 겁이 날 때가 많은데….

“겁난다. 집사람도 알지만 나는 매우 꼼꼼하고 겁이 많은 사람이다. 상상력이 풍부한 편이라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상상을 다 한다. 칠레 연안의 좁은 해역을 따라 올라올 때는 엔진으로 가는데 바람이 세서 고장이라도 나면 배가 밀린다. 암벽 쪽으로 밀릴 때면 간이 녹는다. 하지만 태평양 같은 대양에서는 그런 게 없다. 배에만 있으면 사니까….”

그는 배 이름을 두려움을 모른다는 뜻의 ‘인트레피드(intrepid)’로 지은 것에 대해서도 “처음엔 좋았는데 지금은 사람들이 오해할까 두렵다”고 했다.

―외로움은 어떤가? 1994년 ‘한국계’ 최초로 세계일주 단독항해에 성공한 도널드 S 강(강동석·41) 씨는 특히 배가 몇날 며칠 꼼짝도 못할 때면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이 밀려들었다고 했는데….(강 씨는 한국계이지만 미국 국적이었고, 세계일주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작했다.)

“날씨가 괜찮고, 배가 쭉쭉 나아가면 집에 가는 길이 줄어든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나 단독항해는 무인도 생활이나 마찬가지이다. 누굴 보고 싶다고 해서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럴 때면 다른 일에 몰입해야 한다. 계속 그 생각만 하면 정신이 이상해진다.”

―타히티, 사모아(미정), 그리고 괌을 거쳐 부산으로 올 예정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땅을 밟지 못하고 바다 위에만 떠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나.

“1만 마일 중 타히티까지가 4000마일이니까 한 달이 좀 더 걸린다. 한 달 이상을 바다 위에 떠있게 된다. 지금까지 가장 길었던 게 대서양을 건널 때 15일간인가, 17일간인가 그랬는데 지루하기도 하고 외롭기도 할 것이다.”

―수에즈 운하까지의 중간결산으로 쓴 책 ‘요트로 세계일주 뱃길을 열다’를 보면 영어로 ‘Moonlight sailing’, 한국말로 ‘달빛 돛배 달리기’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요트 항해의 즐거움을 노래하기도 했다. 항해 중에 행복했던 순간, 오직 바다와 요트만이 줄 수 있는 그런 희열의 순간은 없었나.

“다른 사람들은 2, 3명이 즐기면서 오가고 있지만 나는 시간도 없고, 혼자라서 힘이 많이 든다. 그보다는 포기하지 않고 가다 보면 순풍이 밀어줘서 조금씩 귀항거리를 좁히게 되는데, 그런 때는 마음속으로 희열을 느낀다. 인생도 그렇지 않나.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조금씩 나아가면 신기하게도 순풍이 불어준다. 아이들에게도 어려운 순간이 닥치면 그런 얘기를 해 줄 생각이다. 놀러 다니는 것도 아니고 혼자 항해하는 게 뭐가 재미있겠느냐. 에베레스트 등정도 재미있다고 하는 건 아니지 않느냐. 도전하는 과정이 소중한 것 같다.”

항해 초기 만난 어느 영국인은 윤 선장이 세계일주 기간을 1년 정도로 잡고 있다고 하자 대뜸 “It's unhappy(그건 행복한 항해가 아니야)!”라며 손사래를 쳤다고 한다. 그 영국인은 4년 동안 가족과 함께 세계를 항해 중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윤 선장은 애초 ‘해피 크루징’이 아니라 꿈을 향한 도전에 나선 것이었으니, 출발부터 달랐다.

―2003년 국내에서 ‘요트 딜리버리’라는 직업을 개척하면서 한국과 일본 사이를 100여 회 오갔고, 2004년엔 서해 남해 동해의 섬들을 일주한 뒤 ‘요트 뱃길지도를 그리다’까지 펴냈다. 그리고 태평양 횡단을 앞두고 있는데 이제 바다를 좀 알 것 같은가.

“다 끝나면 또 모르겠다. 하지만 끝이 없는 것 같다. 항해를 하면서 ‘내가 이렇게 모르는 게 많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실수, 고통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외국엔 책도 많은데….”

―집에서 생활은 어떻게 하나.

“저도 고생이지만 집사람도 고생이다. 1년 치 생활비를 주고 왔지만 집사람이 기간제 교사를 하면서 버티고 있다. 얼마 전 설날에 셋째가 세뱃돈을 받아 엄마한테 생활비라며 내밀었다는 얘기를 듣고 가슴이 찡했다.”

그가 쓴 책 표지에 이런 말이 있다. ‘최초의 충동을 유지하는 자가 꿈을 이룬다.’

철 없는 사내가 역사를 만든다.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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