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길]<97>‘愛人敬天’ 도전 40년

  • 입력 2009년 9월 29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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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에 다니던 6세 무렵의 장영신 회장. 또래 가운데 드물게 유치원에 다녔을 정도로 부유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사진 제공 애경그룹
유치원에 다니던 6세 무렵의 장영신 회장. 또래 가운데 드물게 유치원에 다녔을 정도로 부유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사진 제공 애경그룹
<20>소녀 장영신

日유학할 정도로 부유했던 부모
광복 뒤 토지개혁으로 가세 몰락
6·25 여고시절 부산서 사과장사

나는 1936년 7월 22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종로구 명륜동에서 자랐는데 비교적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혜화동 성당 유치원을 졸업하고 혜화초등학교를 다녔다. 초등학생 때는 노래를 잘해서 전국 콩쿠르에서 상을 받았다. 초등학교 시절을 돌아보면 친구와 모여 다니며 동요를 불렀던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음악을 가르쳤던 안병원 선생님의 영향이 컸다. 노래 ‘우리의 소원’ 작곡가로 유명하신 분이다. 선생님은 동요가 척박했던 1945년 ‘봉선화 동요회’를 만드셨고 나는 단원으로 활동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지인을 찾아주는 TV 프로그램에 몇 년 전 초대돼 나간 적이 있었는데, 나는 어린 시절 우리에게 동요로 꿈을 주셨던 안병원 선생님을 찾았다. 당시 외국에 거주하시던 선생님은 나를 보고 싶어 일부러 한국으로 오셨다. 학창 시절 항상 1등을 하지는 못했지만 우등생은 됐던 편이었다. 시간을 들여 노력해서 점수를 따야 하는 암기 과목에는 자신이 없었고 수학이나 과학처럼 응용하거나 생각하는 과목을 더 좋아했다. 특히 수학을 잘했는데 나중에 화학을 전공하게 만든 토대가 됐던 것 같다.

경기여중에 입학할 때는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다. 내가 시험을 쳤다고 하니 박은혜 경기여중 교장선생님과 친분이 있던 작은아버지가 되도록 빨리 합격 여부를 알려주겠다고 했다. 평소 공부를 잘했으니 당연히 합격했으리라 생각하신 작은아버지는 발표 하루 전 학교로 알아보았는데 합격자 명단에 내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 주위 사람 모두 그럴 리가 없다면서도 실망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입시에 실패했다는 좌절의 느낌은 어린 마음에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나 30분 후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미안하다는 전화 연락이 왔다. 우수학생 30명의 명단을 따로 뽑아놨었는데 내가 포함됐다는 설명이었다. 30분 만에 느낀 환희와 기쁨은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붙었든지 떨어졌든지 나의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면 결과에 대해서 그렇게 큰 감정의 기복은 없었을 것이다. 결국 성패를 받아들이는 문제는 자신의 내부에서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다. 모든 일의 근본은 외부가 아닌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실감한 사건이었다.

어머니(문금조 씨)는 일본에서 귀족학교로 꼽히는 쓰다 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아버지(장회근 씨) 역시 와세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일제강점기 유학을 갈 정도로 우리 집안은 부유했지만 광복 뒤 실시된 토지개혁 이후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급기야 6·25전쟁을 거치면서 작은아버지 집에 얹혀 살 정도로 피폐해졌다.

6·25전쟁 때는 여고생 신분으로 부산에서 사과 장사를 했다. 어려운 피란살이에 가계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기 위해 시작했다. 시장 한복판에 좌판을 벌여놓고 사과를 예쁘게 쌓아 놓았지만 막상 손님이 와서 얼마냐고 물으면 부끄러워 먼 산을 바라보기 일쑤였다. 내가 딴청을 하면 옆 사람이 보다 못해 대신 팔아줬다.

또 손님이 다가와 사과를 사 줄 때는 조금이라도 멍들거나 상한 것은 빼고, 싱싱한 사과만 골라서 팔았다. 그랬더니 옆에서 함께 좌판을 벌이던 아주머니가 보기에도 딱했는지 혀를 끌끌 차며 참견을 했다. “그렇게 좋은 것만 골라 팔면 어쩌느냐. 장사하는 사람은 이것저것 섞어서 팔아야 이문이 남는다.”

나는 “그래도 어떻게 상한 것을 팝니까”며 얼굴을 붉혔던 기억이 있다. 어릴 적 사과 장사도 그랬지만 지금도 나는 장사를 썩 잘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정직하게 장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만큼은 여전하다.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온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됐고 대학 진학을 고민했다. 가세가 기울어 대학에 가기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까지 당뇨와 고혈압으로 돌아가셨다.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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