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기자의 무비홀릭]잘나가는 배우가 몰락하는 순간들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9월 8일 02시 56분



‘꽃미남’ 붐? 나도 턱 확 깎아봐?
뜬 감독작품 무조건 출연해야지…

“얼굴 여기저기가 쑤셔요.”
비가 심하게 내리던 어느 날, 한 여배우를 인터뷰하다 이런 얘기를 들었다. 성형수술을 하도 많이 해 날씨만 궂으면 ‘신경통’처럼 얼굴 곳곳이 욱신욱신 아파 온다는 것이다. 대중은 “아유, 쟤 또 고쳤어”라며 배우들의 성형사실을 쉽게 도마에 올리지만 배우들의 처지에선 절박한 일일 수밖에 없다. 축구경기장보다 크게 느껴지는 극장 스크린 위로 클로즈업된 자기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뺨 아래에 보일 듯 말 듯한 지름 1mm짜리 점도 한가위 보름달처럼 크고 충격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각이 진 턱이야 오죽하랴. 그놈의 ‘V라인’이 뭔지, 요즘엔 남자배우들까지 얇실한 턱을 갖기 위해 성형을 한다. 턱을 성형한 여배우들은 주로 “치아교정을 했다”고, 남자배우들은 “운동을 심하게 해서 얼굴 살이 확 빠졌다”고 둘러대는 게 요즘 ‘핫 트렌드’다.
문제는, 잘나가던 남자배우가 턱 한 번 잘못 깎았다가 배우로서 몰락하는 경우다. 남성적이고 선 굵은 이미지로 흥행 배우의 길을 가던 A 씨. 그는 ‘예쁜’ 남자가 아니라 ‘잘생긴’ 남자였다. 하지만 ‘꽃미남’ 열풍 속에서 예쁜 남자까지로 지평을 넓히고픈 욕망을 절제하지 못해 그만 턱을 확 깎아냈다.
그 뒤 그의 바뀐 얼굴은 배우로서 그가 점유해온 정체성을 상실하게 만들고 말았다. ‘성격파’ 배우를 하기엔 너무 예뻐졌고, 누나 팬들에게 아양 떠는 ‘꽃미남’ 배우이기엔 나이가 너무 든 것이다(이런 맥락에서, 끝까지 남자다운 턱 선을 고수하고 있는 이병헌의 ‘선택 아닌 선택’이 빛난다). 다른 남자배우 B 씨도 유사한 사례. ‘아저씨 배우’로 연기력을 인정받던 그는 어느 날 턱을 깎고 트렌디한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나오는 드라마와 영화마다 다 망했다.
잘나가던 남자배우 중 일부는 성공에 도취하는 바람에 몰락하기도 한다. ‘연기파 배우’로 유명한 C 씨가 대표적인 경우(아, ‘연기파 배우’란 말은 대한민국에만 있는 단어 아닐까. 연기 못하면서 배우연하는 배우가 얼마나 많으면 이런 희한한 말까지…. 이러다 ‘요리파 주방장’이란 말까지 생겨날 지경이다). 때론 순박하고 때론 광기 어린 이미지로 최고의 연기를 보여줬던 C 씨. 유명해지고 나니까 만나는 팬들마다 자신에게 “어쩜, 너무 멋져요!” “지나치게 잘생겼어요”란 말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팬들은 웬만하면 다 이렇게 얘기하는 법이거늘, 이 말을 듣고 스스로를 진짜 잘생겼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C 씨는 평소 거들떠보지도 않던 청춘멜로물에 출연했다. ‘아, 나도 이제 쿨한 이미지가 될 거야. 그러면 전자제품 광고도 엄청 많이 들어오겠지?’ 하고 굳게 믿던 그는 요즘 하는 영화마다 안 된다.
한편 출연영화가 ‘대박’을 터뜨리며 스타덤에 오른 여배우 중 일부는 ‘제대로 짜증나는’ 차기작만 고르는 신기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유는 두 가지. 너무 생각이 많아서이거나, 반대로 너무 생각이 없어서다. 먼저 여배우 D 씨. 시나리오를 살펴보기는커녕 ‘뜬’ 감독들의 차기작에만 무조건 출연하겠다는 태도를 견지하다 쓴맛을 봤다. 크게 성공한 감독들은 어깨에 힘이 엄청나게 들어가면서 그 다음 작품은 관객과 소통하지 못하는 ‘예술영화’를 만들기 십상이란 사실을 몰랐던 탓이다. 그 다음은 미녀배우 E 씨. ‘얼굴 무지하게 예쁜데 연기도 무지 잘한다’는 평을 들었던 E 씨는 난해한 영화들만 골라서 출연하다 어느새 잊혀져 가고 있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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