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 지오그래픽]‘느림의 미학’ 기찻길 여행 5선

  • 입력 2007년 10월 12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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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인생의 시, 기차는 여행의 연인.’

느림이 아름다움으로 존중받는 이즈음, 기차여행이야말로 느림 미학의 진수가 아닐까.

여행이란 본디 고속의 쾌감보다는 느림의 미학에 더 가까운 원시적 정서다.

초가을 느긋이 계절의 진수를 맛보고 싶은 분, 철길 따라 느릿느릿 질박한 이 땅을 한가로이 주유함은 어떠실지.》

##산중턱을 오르는 ‘하늘열차’

서울 청량리역을 출발해 태백 산골로 가는 열차. 중앙선의 양평, 원주를 지나 제천에서 태백선에 오른 후로는 고깔모자를 닮은 높은 산과 깊은 골을 헤집고 달린다. 이어 영월역부터는 죄다 탄 더미 흔적이 역력한 탄광촌이다. 석항 예미 함백 증산 사북 고한 추전 그리고 백산(태백선 종점). ‘하늘열차’란 이 구간을 말한다. ‘은하철도 999’를 연상시키듯 탄광지대 산악의 아득한 중턱을 타고 오르는 열차를 두고 붙인 이름이다.

그 여행길의 절정은 태백시 추전역. 태백광업소에서 채굴된 석탄 더미가 수북이 쌓인 산비탈 역에는 ‘한국에서 제일 높은 역 해발 855m’라고 쓴 표석이 서 있다. 플랫폼의 서쪽에는 정암터널의 한 끝이 보인다. 한때는 국내 최장(4505m) 터널이었지만 지금은 실치터널(6128m·전라선)과 황학터널(9970m·고속철도 추풍령관통)에 그 자리를 내주었다.

##뒷걸음치는 열차여행, 스위치백 철도

스위치백(switchback)이란 ‘자세를 반대로 바꾸다’라는 뜻. 앞으로 가던 열차가 후진해 가는 것을 말하는데 나선형 철로를 가설할 수 없는 좁은 급경사에 놓인 계단식 철로를 오를 때 채용하는 방식이다. 그런 철길이 국내에 딱 한 곳 있다. 영동선의 심포리와 나한정 두 역 사이다. 두 역은 태백산 통리와 산 아래 삼척시 도계읍 사이 급경사로, 통리와 도계 두 곳의 표고 차(435m)가 그 경사도를 잘 말해 준다.

스위치백의 포인트는 심포리와 나한정 두 역 가운데 있는 흠전역. 앞으로 달리던 열차는 흠전까지 오르거나 내려서서는 뒷걸음쳐 심포리나 나한정역으로 간다. 이때 후진 구간은 상행선(청량리 행)의 경우 오를 때, 하행선(강릉행)은 내려갈 때다. 후진할 때는 차내 방송으로 안내한다.

지금은 사라진 ‘인클라인’(모터로 열차를 견인하는 방식) 철길도 바로 이 비탈에 있었다. 구간은 통리와 심포리 사이. 1940년 철도건설 당시 이 급경사(15도) 구간에는 스위치백 같은 우회 철길을 놓을 여력도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 인클라인 철도였다. 급경사 비탈에 직선 철길을 놓고 위쪽인 통리역에서 열차를 끌어올렸다.

하지만 인클라인도 화물차에만 해당돼 객차는 두 역이 종착역이었다. 그래서 승객은 열차에서 내려 가파른 비탈을 걸어 오르내리며 다음 역으로 가서 갈아탔다. 노인과 여자에게는 고역이었지만 까까머리 중고교생에게는 용돈벌이였다. 짐 운반은 물론 자리 잡아 주기가 수지맞는 아르바이트였으니까.

인클라인 철도가 사라진 것은 1963년이지만 스위치백 철길은 아직 그대로다. 이것도 퇴역할 날이 2년밖에 남지 않았다. 공사 중인 루프(나선형 터널) 식 철길로 대체된다. 루프 식의 솔안터널(16.2km)은 작년 말에 공사가 완성됐다. 정식 개통이 되면 국내 최장 터널로 등극할 예정이다.

##속세를 등지고 달리는 낙동강협곡열차

오직 철도만 통과하는 오지, 걷거나 자동차로 갈 수 없고 오직 기차로만 지날 수 있는 곳이 있다. 승부와 분천, 두 역 사이의 ‘낙동강 협곡열차’(영암선) 구간이다.

백산역(태백선 종착점)에서 영주행 철길로 바꿔 타면 곧 철암역이다. 영암선(철암∼영주)의 시발이자 종착점인데 철암역을 출발한 열차는 이내 물 흐름 빠른 강물을 벗 삼아 달린다. 낙동강이다.

추전역 근방의 백두대간 두문동재 산비탈(너덜 샘)에서 발원한 이 물은 태백에서 황지천을 이루어 구문소에서 바위를 뚫고 흐르다 예서 비로소 강의 모습을 갖춘다. 그 거센 물살은 협곡을 이루고 그 협곡을 따라 영암선 철길은 달린다.

협곡의 끝은 경북 봉화군 현동. 철길은 바위를 깎아 겨우 확보한 옹색한 절벽 길을 따라 붙는데 그 철길 옆으로 펼쳐지는 풍경이 기막히다.

이 중 오직 기찻길만 놓인 채 사람의 발길을 거부하는 곳은 승부∼양원(임시승강장)∼분천 역 구간. 강변의 승부역은 ‘눈꽃열차’ 운행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하늘도 세 평, 꽃밭도 세 평’이라는 역 구내 바위벽의 글귀로 더 유명하다.

영암선은 6·25전쟁 직후인 1955년 개통된 산업철도. 87km 전 구간 중 20km가 다리(55개)와 터널(33개)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지형이 얼마나 험난한지 알 수 있다. 어렵던 시절 이룩한 난공사 구간의 이 철도, 당시 산업의 동력이었던 석탄을 실어 나르는 이 철길이 얼마나 대견했던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승부역 철길 옆에 준공기념비까지 세웠다.

##동해를 정면으로 감상할 수 있는 바다열차

스쳐 지나치는 일상과 자연의 풍경을 편안히 기대어 앉은 채 차창을 통해 물끄러미 바라보며 즐기는 여유, 이것이 열차여행의 매력이 아닐까. 그중에서도 백미라면 영동선의 강릉과 정동진 두 역 사이에 펼쳐지는 바닷가 풍경이다. 그러나 이 구간은 너무 짧아 늘 아쉽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올해 7월에 운행을 시작한 ‘바다열차’다. 삼척과 강릉 사이 58km로, 동해 묵호 망상 정동진을 지나 두 역을 오가는 데 총 1시간20분이 걸린다. 내내 바다가 펼쳐지는 것은 아니지만 심심찮게 바다풍경이 펼쳐지니 바다를 벗해 달린다는 느낌이 진하게 든다.

바다열차는 국내 최초의 전망객차다. 전망객차란 좌석이 차창을 향하도록 2열로 배치한 특수차. 마치 영화를 보듯 정면의 통 유리창을 통해 펼쳐지는 동해의 풍경을 편안히 감상할 수 있다. 일본의 이토반도(시즈오카 현) 해안철도에 비슷한 것이 운행되고 있다. 와인과 초콜릿을 서비스하는 프러포즈룸(4인용 컴파트먼트 객실, 2인에 5만 원)도 있는데 연인과 가족의 단란한 여행을 돕는다.



##아라리가락 훑는 정선 꼬마열차와 레일 바이크 여행

2000년 11월 14일 오후 7시 15분. 정선선의 종착점인 구절리역에서는 완행열차인 비둘기호가 평소와 다름없이 증산역을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이후 다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비둘기호 열차였다.

그렇다. 이 두메산골의 호젓한 철길은 가장 느리고, 가장 낡고, 가장 낙후한 열차가 가장 마지막까지 운행됐던 곳이다. 이 정선선 비둘기호만큼 각별한 사랑을 받은 열차도 없었다.

‘꼬마열차’라는 별명이 그것을 말해 준다. 꼬마열차는 기관차 뒤에 달랑 한 칸, 많아야 두 칸의 객차를 매단 채 단선의 정선선 철로를 앙증맞게 달리던 비둘기호 열차에 붙은 이름이다. 정선선은 1966년 태백선의 지선으로 구절리 탄광의 무연탄을 실어 나르기 위해 개통(당시는 예미∼증산∼고한)된 철길. 정선과 구절리 구간(39km)은 1년 후에 추가로 개통됐다.

이 열차가 1990년대 후반 세상의 관심을 모은 것은 구절리와 아우라지를 잇는 철길 구간(7.2km)의 폐선 방침 때문이었다. 이 구간은 정선아라리의 모태인 아우라지(두 물이 만나 하나로 아우러지는 합수지점)의 한 축인 송천의 물길을 따른다.

산중 계곡의 오지비경을 열차 안에서 차창으로 감상할 수 있는 운치 있는 코스였던 만큼 폐선 방침에 아쉽다는 반응이 많았다. 그 덕분에 여행객의 발길이 잦아지기 시작했던 것.

하지만 이 구간은 2004년 3월 31일 결국 폐선됐다. 그 날은 KTX 개통으로 한국철도의 역사가 새롭게 쓰인 날이었다. 구절리∼아우라지 구간 폐선은 그 뉴스에 가려 알려지지 못했다.

그로부터 1년여 뒤인 2005년 7월 폐선 철길로 레일 바이크가 다니기 시작했다. 자전거처럼 페달을 밟아 레일 위를 달리는 이 초경량 궤도차는 느긋하게 주변 경관을 살피며 송천 물가의 두메산골 풍광을 감상하는 여유를 선사해 꼬마열차에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레일 바이크는 구절리에서 아우라지 쪽 한 방향으로만 운행한다.

꼬마열차도 부활했다. 증산∼아우라지 구간을 하루 2회 객차 두 량을 달고 운행 중인 통근열차가 그것이다. 옛 모습의 비둘기호 열차 대신 카페 분위기를 내는 호화로운 관광열차이기는 해도….

정선5일장 관광열차(청량리역 출발)도 있다. 숫자 2와 7로 끝나는 날에만 운행한다. 산악자전거를 싣고 가 정선산골을 누비는 MTB열차도 운행 중이다.

●여행정보

◇철도

▽추전 역=청량리↔강릉, 제천↔강릉 구간에 지난다.

▽스위치백 철도=청량리, 제천↔강릉, 부산, 영주↔강릉 구간에 지난다.

▽낙동강 협곡열차 △열차타기=이 구간(백산역∼현동 역)만 운행하는 관광열차가 없으니 여기를 지나는 정기편 열차(태백→영주, 영주→태백)를 이용. △승부역 오지 트레킹&협곡열차 패키지=태백의 구문소, 승부역의 낙동강변 오지트레킹 후 협곡열차로 봉화역까지 여행. 매주 토요일 서울에서 출발(오전7시 30분)하는 당일 버스투어(4만3000원). 승우여행사(www.swtour.co.kr) 02-720-8311

▽삼척 △바다열차=하루 3회 왕복운행. 온라인 예약은 코레일투어서비스(www.korailtours.com) 033-573-5474

▽정선 △정선선 꼬마열차=증산∼아우라지 하루 2회 왕복(증산역 출발: 오전 9시, 오후 2시), 1400원. △레일 바이크=구절리에서 2시간마다 출발(오전 9시∼오후 9시). 2인승(1만8000원)과 4인승(2만6000원)이 있으며 온라인 예약도 가능. 코레일투어서비스(www.korailtours.com) 1544-7786 △정선5일장 관광열차=코레일투어서비스(www.korailtours.com)에서는 자유여행은 물론 화암약수와 화암동굴, 산악자전거와 레일 바이크, 정선선 꼬마열차투어 등을 연계한 다양한 5일장 열차패키지를 판매 중. 1544-7786

글·사진=조성하 여행전문기자 summer@donga.com

▼곤돌라서 요리 먹고, 분수쇼 구경하고 ‘하이원리조트’로 오세요▼

강원도 열차여행 중에 꼭 들러 볼 곳이 있다. 정선군 고한읍 하이원리조트다. 고한, 사북 두 역에서 가깝고 역까지 셔틀버스가 운행되니 오가기도 좋다. 청량리에서 강릉행 열차로 갈 수 있고 추전역 아우라지역이 모두 근방에 있다. 1박 후 낙동강협곡열차(추전역)를 타거나 바다열차(삼척시)를 타기에도 좋다.

카지노라고 해서 거부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카지노 외에도 즐길 거리가 많기 때문이다. 하이원은 정부가 석탄산업 합리화 방안의 하나로 지역경제 활성화 차원에서 투자한 국민관광시설이어서 비(非) 카지노 고객에 대해서도 서비스(무료)가 훌륭하다.

대표적인 것이 매일 밤 해발 1000m의 호텔 앞 호수에서 펼치는 대규모의 음악 분수 쇼(20분간). 음악에 맞춰 3000개의 노즐에서 뿜어 나오는 물줄기는 30여 개 다양한 패턴으로 2800개 조명에 물든 상태로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는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벨라지오 호텔 분수 쇼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매일 오후 8시 10분, 9시 10분에 시작.

호텔 3층의 카사시네마에서는 러시아무용단 혹은 중국기예단의 매직쇼와 버라이어티쇼, 영화를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지하층에는 ‘어드벤처 팰리스’라는 실내 테마파크와 실내 풀(이상 유료)도 있다.

스카이 다이닝(Sky Dining)도 눈길을 끄는 이색체험이다. 스키장 정상(마운틴 톱·해발 1250m)으로 오르는 곤돌라 안에 차려진 테이블에서 수프와 전채요리를 먹고 정상의 ‘톱 오브 더 톱’ 레스토랑에서 메인 요리와 디저트를 즐기는 코스. 하늘에서 음식을 즐긴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레스토랑 ‘톱 오브 더 톱’은 45분마다 한 바퀴를 회전하는 산정 타워. 지장산 함백산 백운산 등 ‘산의 바다’가 이루는 풍광을 앉은 채로 360도로 즐길 수 있다. 가격은 4만2000원, 4만9000원(세금, 봉사료 포함) 두 가지이며 오후 6시에 시작한다. 월요일은 쉬며 예약도 받는다. 매년 봄부터 가을까지만 운영하는데 올해는 10월 28일까지다.

▽문의=www.high1.co.kr 1588-7789, 033-590-7981

정선=조성하 여행전문 기자 summ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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