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의사의 길’ 접고 게임 창작에 빠진 ‘디지털 게릴라’

  • 입력 2006년 10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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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에서 제자들과 함께한 김광삼 교수. 게임을 하던 제자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니 모니터 화면을 딴 걸로 바꿔 놓았다. 게임도 공부인데 괜스레 쑥스러웠던지 수줍은 미소를 짓는다. 원대연 기자
연구실에서 제자들과 함께한 김광삼 교수. 게임을 하던 제자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니 모니터 화면을 딴 걸로 바꿔 놓았다. 게임도 공부인데 괜스레 쑥스러웠던지 수줍은 미소를 짓는다. 원대연 기자
이탈리아의 옛날이야기 한 토막.

부유하진 않아도 나름대로 존경받는 귀족 집안이 있었다. 은행가 아버지는 자식이 가업을 잇기를 바랐다. 하지만 둘째 아들은 미술을 하겠다고 했다. 당시 귀족들에게 화가는 수치이자 천시의 대상. 아버진 매질까지 했지만 아들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만약 그때 둘째 아들 미켈란젤로가 아버지의 뜻을 따랐다면 후세인들은 ‘천지창조’나 ‘다비드 상’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청강문화산업대 컴퓨터게임과 김광삼(34) 교수도 비슷한 사연을 갖고 있다. 김 교수의 부친은 장남이 자신처럼 외과의사가 되길 원했다. 아들은 부친의 뜻대로 의대에 입학해 의사면허를 땄다. 그러나 그의 심장에는 또 다른 꿈이 꿈틀대고 있었다.

만약 그때 김 교수가 의사가 됐다면 우리는 세계가 주목한 독립게임 개발자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1990년대 PC통신과 인터넷을 들끓게 한 게임 ‘그녀의 기사단’과 ‘푸른 매’도 빛을 볼 수 없었다.

○ 열정은 숨길수록 드러난다

이젠 어엿한 교수 신분이지만 컴퓨터 게임이 하나의 산업이나 문화 장르로 인식된 건 아주 최근의 일이다. 그나마 중장년 세대에겐 여전히 낯설다. 의학도의 길을 걷던 아들이 갑자기 게임 개발을 선언했을 때 부모의 마음이 편했을 리 없다.

“여전히 탐탁지 않아 하시죠. 어릴 때부터 ‘여러 분야의 교육’을 시키셨지만 의사는 기본 전제였거든요. 저 역시 다른 직업은 생각도 안 했습니다. 장남에 대한 기대가 커서인지 지금도 돌아오라고 권유하세요.”

여러 분야의 교육. 외과의사인 아버지와 신학대 교수인 어머니는 자식이 ‘교양과 철학을 지닌 의사’이길 원했다. 어려서부터 음악 미술 컴퓨터 등을 두루 배운 덕에 웬만한 악기 연주는 물론 작곡 솜씨도 일품이다. 그러나 그건 김 교수의 열정에 날개를 달아준 셈이 됐다.

“창작하는 걸 좋아했습니다. 초등학생 시절에 쓰고 그린 글과 그림이 한 트럭도 넘습니다. 음악 미술에 컴퓨터까지 배워서인지 자꾸 욕심이 늘더군요. 글에 스토리를 엮고, 그림이 만화가 되더니 결국엔 동영상까지…. 초등학교 1학년 때 장편만화, 4학년 땐 컴퓨터 게임을 만들었죠.”

의대에 진학했어도 열정은 계속 타올랐다. 드러내고 하기엔 조심스럽던 그에게 PC통신의 익명성은 도화선이 됐다. ID ‘별바람’으로 발표한 온라인 게임에 누리꾼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창작이 주는 ‘참 맛’에 빠져들던 순간이다.

○ 돈보다 행복을 찾는 직업

반응은 달콤했지만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게임 개발과 학업을 동시에 하기는 쉽지 않았다. 2번의 유급. 두 학번 후배인 아내를 만나 첫사랑에 빠지며 게임을 잠시 접는 바람에 졸업이 가능했다.

“졸업 직후 바로 결혼했습니다. 신혼여행에서 ‘참 행복’에 대한 얘길 나누다 게임이 떠올랐죠. 진정한 행복은 거기에 있단 걸 깨닫고 아내에게 털어놨습니다. 다행히 원래 엉뚱한 사람이란 걸 알고 있던 아내가 이해해주더군요.”

‘원 맨 밴드(one man band)’라는 음악 용어가 있다. 작곡, 작사는 물론 연주와 노래를 혼자서 다 하는 밴드다.

김 교수가 추구하는 건 ‘원 맨 개발자’다. 프로그램, 그래픽, 뮤직 등을 모두 혼자서 다룬다. 물량 투입식 개발에 익숙해진 게임업계에선 이해하기 힘든 방식이다.

“처음부터 돈 보고 시작한 건 아니거든요. 만화에도 작가주의가 있듯이 게임도 상업성보다는 예술성을 지닌 작품이 나와야 합니다. 그건 거대 기업이 아니라 독립개발자들이 해야 할 과제죠.”

국내외 게임업체들이 제시한 매력적인 제안을 뿌리친 채 김 교수는 꿋꿋이 자기 길을 걸어왔다. 이제 와서 상업개발로 돌아선다면 팬들이 먼저 외면할 것이라고 그는 믿는다. 대학에 들어온 것도 학생들이 단순한 ‘업자’가 아닌 ‘꿈을 가진 개발자’가 되는 데 도움을 주고 싶어서다.

“올 1월 ‘한국게임개발자협회장’을 맡았습니다. 쉽진 않지만 영세한 개발자들에게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남을 돕고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의사’가 되길 바라셨죠. 의사는 아니지만 세상에 ‘플러스알파’가 되는 삶을 산다면 부모님도 기뻐하실 겁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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