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자비]평화를 원하는가… 먼저 껴안아라

  • 입력 2006년 7월 20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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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국 갤럽이 실시한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에 관한 조사 결과를 봤다. 그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 중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응답한 사람이 절반이 넘는 53.5%로 나왔다. 조사 내용에서 필자의 관심을 끈 것 중 하나는 종교를 갖는 이유였는데,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하여’가 67.9%로 압도적으로 많았고, 다음이 ‘복을 받기 위해’(15.6%), ‘죽은 다음 영원한 삶을 위해’(7.8%),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7%)의 순이었다.

세상이 돌아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그에 따라 우리 삶도 각박해지기 쉬운 오늘날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이 예전에 비해 어려워지는 듯하다. 그나마 종교가 마음의 평화를 얻게 하는 안식처가 된다는 사실이 가톨릭 사제인 필자에게는 작은 위안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마음의 평화’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면 마음 한편이 답답해짐을 느끼게 된다. 국어사전에는 평화를 ‘인간집단 상호간에 무력 충돌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로 정의되어 있는데, 이 정의에 만족하기에는 ‘평화’라는 말의 의미가 너무 깊고 심오하기 때문이다. ‘평화’라는 것은 ‘나만 편하면 된다’는 이기주의를 말하는 바는 아닐 것이다.

나의 말이나 행동, 가치관, 그리고 대화의 자세가 타인에게도 똑같이 사랑과 대화와 화해라는 ‘평화’의 메시지로 전달될 때만이 진정한 평화가 구현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얼마나 머리를 싸매고, 서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지는, 싸움을 해보고 또 화해를 시도해 본 사람이라면 쉽게 가늠할 수 있다.

사회가 변화하면서 잠재된 갈등들이 표출되는 현실을 본다. 보수와 진보, 노조와 경영진의 갈등은 물론이고, 선생님과 학생 혹은 학부모 간의 갈등이나 가족 내 갈등도 점점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다. 자신의 문제나 의문을 건강하게 표출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만큼 상대에 대한 이해도 깊어야 한다. 늘어나는 신앙인들의 수와 그들이 신앙을 갖는 이유를 살펴보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에 대해 무거운 책임감을 다시 한번 느낀다.

이정주 천주교 광주대교구 70주년 준비위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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