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김사인, “여름날”

  • 입력 2006년 6월 23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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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들이 시드렁거드렁 자랍니다

제 오래비 시누 올케에다

시어미 당숙 조카 생질 두루 어우러져

여름 한낮 한가합니다

봉숭아 채송화 분꽃에 양아욱

산나리 고추가 핍니다

언니 아우 함께 핍니다

암탉은 고질고질한

병아리 두엇 데리고

동네 한 바퀴 의젓합니다

나도 삐약거리는 내 새끼 하나하고

그 속에 앉아

어쩌다 비 개인 여름 한나절

시드렁거드렁 그것들 봅니다

긴 듯도 해서 긴 듯도 해서 눈이 십니다

-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창비) 중에서

더없이 고요해 보여도 여름 풀밭 속은 떠들썩합니다. 바랭이가 긴 수염뿌리 쓰다듬으며 행차를 하니, 땅빈대 줄기가 납작 엎드립니다. 억새와 수크령의 멱살을 잡으며 한사코 한삼덩굴이 기어오르고, 밭두렁에서는 쇠비름, 돼지비름, 참비름이 모여서 항렬을 따지지만 결론이 날 리 없습니다. ‘시어미, 당숙, 조카, 생질’들이 서로 삿대질하는 듯하지만 가만히 보면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바람 불어도 쓰러지지 않습니다. 저마다 생긴 것 다르고, 꽃 색깔 달라도 스스로 의젓합니다. 저 강인한 생명의 연쇄, 영원히 긴 듯도 해야 하고말고요.

시인 반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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