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김용희]‘왕의 남자’가 가져다 준 선물

  • 입력 2006년 5월 24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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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판 신나게 노는 것으로 순식간에 관객 천만을 돌파해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영화 ‘왕의 남자’가 지난달 막을 내렸다. 연극 ‘爾(이)’를 원작으로 하는 ‘왕의 남자’는 드라마틱한 광대들의 삶과 화려한 공연을 보여 준다.

광대들은 왕을 가지고 놀고, 먹고살기 위해 놀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논다. 그렇게 놀이의 극치에서 영화는 현실의 애욕과 비애를, 열망과 좌절을 보여 준다. 장생과 공길은 한판 신나게 노는 것으로 생에서 자유와 분노, 열망을 발산한다. 연산은 놀이를 통해 훼손된 유년의 기억과 상처를 위로받으려 한다. 광대놀음에 불과한 이 ‘거대한 헛것’이 실은 더 실제적인 극(極)현실이라는 사실, 은폐하고 싶었던 욕망의 드라마였다는 사실이다.

한국영화 대박을 위한 몇 가지 아이콘이 있어 왔다. 블록버스터라고 불릴 만큼 관객 동원에 성공했던 영화 ‘쉬리’ ‘살인의 추억’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웰컴 투 동막골’을 떠올려 보자.

우선 한국인은 가상의 판타지보다는 현실적 역사, 이념과 민족의 문제에 몰두해 왔다. 한국인은 무엇보다도 역사에 대한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 관념적 이상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곳에서의 현실, 실제에서의 삶에 주목한다.

‘왕의 남자’를 영화로 만들 때 충무로에서의 예측은 이러했다. 한국인의 정서에서 ‘동성애 영화’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 사실 이와 같은 두려움 때문에 영화는 연극에서보다 동성애 모티브가 훨씬 약화됐다. 오랫동안 이성애 중심의 순혈주의 전통을 강조해 왔던 한국인의 풍속을 생각해 보면 그럴 법도 하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관객들은 동성애를 선택했고 ‘꽃미남’ 이준기 신드롬에 폭발적으로 빠지고 만 것이다. ‘올드보이’에서의 근친상간 모티브 또한 한국적 정서에서는 매우 이질적이고 금기적인 소재였다. 근친상간의 전통은 차라리 ‘일본적’인 것이다. ‘올드보이’가 일본만화를 원작으로 한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 어릴 적부터 일본만화에 심취하여 일본만화를 통해 일본어를 습득하는 ‘N세대’를 염두에 둔다면 그리 크게 놀랄 일은 아니다.

요는 한국인의 정서와 문화가 다문화적인 것, 다양한 것의 차이를 수용하며 억압된 것에 대해 문제적 시선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문화적 선진성과 풍성한 문화 향수능력을 가질 만큼 세계적으로 진화했다는 사실이다.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은 한민족의 정통성과 민족주의를 강력하게 이념화하면서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하려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민족 주체성 이념이 폐쇄적 배타성을 동반하기도 했고 지배 이데올로기로 전락하기도 했다. 사실 한민족은 역사적으로 유교적 국가주의가 팽만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다른 문화와 문명을 다양하게 수용하고 전달하면서 창의적 전통을 만들어 왔다. 반도적 유연함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유연한 창조적 발상과 문화 흡수의 탄력이 바로 ‘한판 신나게 놀아 보는 놀이’ 정신에서 나온 것은 아닐까. 신명나는 타령에 걸쭉한 해학적 일갈. “그래 징한 놈의 이 세상. 한판 신나게 놀다 가면 그뿐! 광대로 다시 만나 제대로 한번 맞춰 보자.”(마지막 신의 장생 대사) 어깨춤 덩실덩실 추는 자유와 유희의 정신으로 연민과 교신의 마음으로. 차이와 차별을 넘어, 편견과 오만을 넘어.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되지 않을까.

저 뜨거운 6월에. 자유의 정신과 놀이의 공동체로, 몸과 마음의 모든 억압을 벗고. 붉은 티를 입고 시청 앞 광장에 모여서. 모두 함께 꼭짓점 댄스를 추면서 말이다.

김용희 문학평론가·평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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