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622>卷七.烏江의 슬픈 노래

  • 입력 2005년 11월 25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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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그때 성양(城陽)에는 임시 재상으로 임치를 지키던 전광(田光)이 임치를 잃고 쫓겨 와 있다가, 고밀을 빠져나온 제왕(齊王) 전광(田廣)을 맞아들여 농성할 채비를 했다. 져서 쫓겨왔다고는 하나 제왕이 데려온 군사는 남은 초나라 원병(援兵)과 제군(齊軍)을 합쳐 3만이 넘었다. 임시 재상 전광이 데려온 군사에다 원래 있던 성양성 안의 군민들과 합쳐 보니 싸울 수 있는 병력만도 5만에 가까웠다.

거기다가 성양은 전에 전횡(田橫)이 패왕 항우와 맞서 몇 달이나 버텨낸 성이었다. 성벽은 높고 두꺼웠으며 성안 백성들도 믿을 만했다. 이에 제왕 전광은 다시 한 번 매서운 전의를 다짐과 아울러 사람을 영하(영下)에 있는 전횡에게로 보내 한신의 등 뒤에서 군사를 움직여 달라고 일렀다.

한편 한신은 고밀성이 떨어지자 그 하루 군사를 쉬게 하고 전과(戰果)를 헤아려 보았다. 한나라 장졸 모두가 힘을 다해 싸웠으나 누구보다도 관영이 세운 공이 컸다. 조참과 협공하여 용저를 목 베고 그 부장(副將) 주란을 사로잡은 것 말고도, 초나라 우사마(右司馬)와 연윤(連尹) 각 한 명과 제나라를 도우러 온 누번(樓煩) 장수 열 명을 사로잡았다.

다음 날 한신은 전군(全軍)을 단 한 갈래도 흩지 않고 한 덩이로 휘몰아 성양으로 달려갔다. 밤낮 없이 닷새를 달려 성양에 이른 한신은 적에게 숨 돌릴 틈을 주지 않고 그대로 성을 에워쌌다. 성안에 있던 제(齊) 초(楚) 연합군은 만만찮은 투지로 맞서는 제왕 전광을 따라 잘 싸웠다. 제왕 전광이 성양성 안으로 쫓겨든 바로 그 다음 날이었다.

성을 에워싼 한나라 대군의 기세는 엄청났으나 처음 며칠 성안의 제 초 연합군과 그들 편에 선 백성들은 겁내지 않고 맞섰다. 하루에도 몇 번씩 되풀이되는 불같은 공격을 잘 막아냈다. 하지만 성안 군민들의 피를 말리는 듯한 한신의 교묘한 전략과 제나라로 들어간 한군(漢軍)의 전력을 집중한 강공(强攻)을 끝내 견뎌내지는 못했다.

성을 에워싼 지 닷새째 되던 날이었다. 밤새 요란한 북소리와 횃불과 함성으로 번갈아 제나라와 초나라 군사들을 성벽 위에 잡아두었던 한군이 마침내 총공세로 나왔다. 한낮이 되자 성안 군민들이 모두 졸음을 이기지 못해 끄덕거리고 있는데, 한나라 10만 대군이 사면팔방으로 일시에 성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모두 죽기로 싸워 성을 지켜라! 상국 전횡(田橫)이 올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제왕 전광이 직접 칼을 빼들고 그렇게 소리치며 군사들을 격려했으나 이미 그물에 든 고기 신세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조참과 관영이 앞서 성벽 위로 뛰어오르자, 저희 장수 태반을 고밀에서 잃고 갈팡질팡하던 초나라 군사들이 먼저 창칼을 내던지며 항복하기 시작하고, 지친 제나라 군민들도 하나둘 그 뒤를 따랐다. 성벽 위가 한군의 붉은 기치로 덮여가는 것을 보고 일이 돌이킬 수 없게 되었음을 안 제왕 전광은 하늘을 우러러 길게 탄식했다.

“내리는 것도 하늘이고 거두는 것도 하늘이다. 하늘이 제나라에 내릴 것이 이것뿐이었다면 낸들 어찌하겠는가!”

그리고는 들고 있던 칼로 제 목을 찔러 죽었다. 비록 전횡이 세운 왕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천하의 패왕 항우를 겁내지 않고 맞서 싸우다 죽은 산동의 효웅(梟雄) 전영(田榮)의 아들다운 최후였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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