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고정일]광복 60년, 홀대받는 우리말

  • 입력 2005년 8월 16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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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이극로, 정인승, 이희승이 을유문화사 편집실 문을 밀고 들어섰다. 격앙된 얼굴들이었다. 이극로가 손에 들고 온 원고 뭉치로 책상을 내리쳤다.

“36년 만에 완성된 우리 국어 큰사전에 누구 하나 관심조차 보이지 않으니, 광복된 의의가 어디 있단 말이오? 그래 이 원고를 가지고 왜놈들한테 가서 사정해야 옳단 말이오?”

따지고 보니 1910년 강제합방되던 그해부터 국어학자들은 큰사전 작업을 해 온 셈이다. 이극로는 당시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 간사장이었다. 큰사전 출판을 위해 출판사를 몇 번이나 찾아왔으나 허탕만 치고 돌아갔고 이번이 세 번째 방문길이었던 것. 을유문화사의 정진숙 전무, 조풍연 주간, 민병도 사장 등은 이 한글학자의 뜨거운 열의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출판사가 이 역사적인 일을 외면할 수는 없소. 먼저 제1권만이라도 내봅시다.”

큰사전은 결국 1947년 첫 권을 출판했고, 6·25전쟁 참화를 딛고 난 뒤인 1957년 전 6권을 완간하게 된다. 시작한 지 47년 만이다. B5판 양장 3804쪽 올림말 16만4125개, 한글 창제 500년 만의 민족적 쾌거였다. 이에 대해 1957년 3월 22일 동아일보 사설은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말 ‘큰사전’을 보건대 인쇄, 제본, 장정 등에서 진선지미(盡善至美)할 뿐만 아니라 내용도 명실 공히 우리나라 최대 저작이요 인쇄문화의 최고봉일 줄로 안다. 한 출판사의 희생과 미국의 지원 또한 문화 봉사라고 볼 수 있다….”

1910년 박은식, 주시경, 최남선이 주도한 조선광문회 한글운동의 하나로 김두봉, 현채, 권덕규 등이 주도한 말모이(우리말사전) 편찬이 우리말 큰사전 작업으로 이어졌다. 1942년 일제는 결국 조선어학회 회원 33명을 구속하여 모진 고문을 했다. 이윤재와 한징은 함흥형무소에서 옥사하고 만다.

그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2005년 4월 19일 미국의 링컨박물관 개관식에서 뜨거운 환호와 박수가 울려 퍼졌다. 개관을 기념해 ‘새로운 자유의 탄생’이라는 주제로 공모한 에세이 콘테스트에서 재미동포 이미한 양이 5400여 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대상을 차지한 것이다. 이 양은 진외조부 정인승을 기린 에세이 한 편으로 온 미국을 감동시켰다.

“나는 자유에 대한 이해를 언어에 대한 이해로 연결짓는다. 나의 증조부께서는 일제에 의해 한글 사용이 금지되던 시절, 최초의 한글사전을 편찬하다 체포되셨다. 할아버지는 개인의 사상을 형성하고 나누는 매개체인 언어를 금지하고 박해하는 것은 곧 사상을 박해하는 것이라고 믿으셨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1만여 명의 귀빈은 모두 이 양의 에세이에 귀를 기울였다.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의 국어 수호 투쟁을 ‘언어와 자유’의 관계를 일깨우는 소중한 사례로 제시한 이 양의 에세이는 국제적 주목을 받게 만들었다.

한데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국어 글쓰기와 말하기 등의 표현 능력이 부실해 보고서조차 제대로 작성하지 못하는 사회인들, 자기 나라 말보다 남의 나라 말을 더 잘하려고 애쓰는 대학생들, 방학철만 되면 줄줄이 해외로 떠나는 영어 연수생들, 유치원에서 대학교까지 마치 영어 강박증에 걸린 것처럼 시달리는 학생들. 먼저 우리말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곧 자유이고, 사상이며, 정신임을 망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말과 글을 잃으면 민족도 멸망한다”고 주시경은 말했다. 주시경은 민족혼을 일으키기 위해 나라말을 연구하고 가르쳤다. 광복 60년을 맞은 오늘, 왜 우리는 빼앗겼다 어렵게 찾은 국어를 홀대하고 있는가.

학교에서의 국어교육 강화, 그에 따른 풍부한 독서와 생각하는 훈련이 절실하다.

고정일 동서문화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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