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포럼/박성주]‘동북아 허브’가 되려면

  • 입력 2005년 6월 13일 03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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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0월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주요 경영대학장 11명이 서울에서 경영교육의 이정표가 될 만한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서는 아시아의 경제력이 전 세계를 주도할 21세기를 맞아 이를 뒷받침할 경영인재를 양성하는 능력을 아시아의 경영대학들이 협력해 키워 나가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또한 이를 추진하기 위한 기구로서 아시아태평양경영대학협의회(AAPBS)를 결성했다.

이날 회의에서 초대 임원들도 선출됐는데 회장에는 필자가, 부회장엔 중국의 칭화대 경영대학장, 운영위원에는 인도 경영대학장과 호주 시드니 경영대학장이 선출됐다. 또한 이 회의에서는 회원 학교를 모집하고 연차총회와 아시아 경영대학 인증 등 여러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본부를 어디에 둘 것인지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홍콩 과학기술대와 싱가포르 국립대는 국제 활동이 자유로운 홍콩과 싱가포르를 제시했고 칭화대는 이미 중국 교육부와 얘기가 있었다며 베이징에 설치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이 조직의 잠재적 영향력과 경영교육의 동북아 허브로서의 의미를 살리고 싶은 나로서는 초대 회장이 있는 서울에 설치하자고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그러나 이 결정이 큰 고난의 여정이 되리라는 것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애당초 잘못은 무엇보다도 이 단체의 의의가 분명하고 참여 학교가 각 나라의 유수한 학교들이어서 우리나라 교육인적자원부의 허가를 받아 민법에 의한 비영리 사단법인을 설립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으로 쉽게 짐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11명의 창립이사 중 한 명만 한국인인 국제적 비영리기구를 우리나라에서 정식 법인체로 설립한다는 것이 무모한 일이라는 것을 수개월간의 갖은 노력 끝에 알게 됐다.

주민등록도 없고 인감증명도 없는 외국인들을 구성원으로 국제적인 법인체를 만드는 것은 아직도 우리 법체계에서는 어려운 일이다. 특히 회장이 바뀌어 주요 임원이 모두 외국인이 될 수도 있는 국제 조직을 한국에 정식 등록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결국 관련 공무원들이 취지에 공감해 적극 도와줬음에도 불구하고 제도적인 제약으로 정식 법인체로 등기하는 것을 포기하고 영속성에 문제가 있는 의제법인으로서 국세청의 고유번호등록으로 일단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의 경험은 우리에게 여러 시사점을 줬다. 그동안 세계화니 개방화니 하며 많은 변화를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사회는 대단히 폐쇄적이다. 그 근본에는 사람들의 사고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법과 제도가 자리 잡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법과 제도가 어떤 행위의 과정과 결과보다는 초기의 허용요건을 지나치게 규제하는 ‘입력(入力) 중시의 사고’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시작은 까다롭게 하지만 과정이나 결과는 따지지 않고 대충 넘어가는 데에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법인 설립의 경우에도 선진국에서는 설립은 쉽지만 설립 후 불법적인 활동은 철저히 규제한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에서는 설립은 까다롭게 하되 설립 후의 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방임적이다. 모든 대상을 잠재적 범법자로 보는 입력 중시의 사고에서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범법 가능성을 판별해 내야 하므로 구비서류도 많고 절차도 복잡해진다. 따라서 개방화, 세계화와는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입력 중시의 사고와 관행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의 근원이다. 예를 들면 대학교육에서도 최대의 관심이 입시에 집중돼 있어 대학 입학은 어렵지만 졸업은 식은 죽 먹기이며, 각종 연구에서도 연구비 집행은 까다롭게 통제하나 연구 성과에 대한 평가는 대단히 후해 본질적 임무는 도외시되는 경우가 흔하다.

우리는 자주 정부의 규제가 계량적으로 얼마만큼 감소했다는 발표를 접한다. 그러나 규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구비서류를 몇 건 줄이는 노력보다 기존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는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입력 중시 사고에서 과정과 결과 중시 사고로 바뀌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고질적인 정부 규제 문제를 해결하고 국가경쟁력도 높이며 동북아 허브도 이루는 길이 아닌가 싶다.

박성주 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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