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포럼]최원식/‘국민통합’이 목적이다

  • 입력 2004년 8월 29일 19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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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의 망령들이 사방에서 출몰한다. 친일파 논쟁이 재연되면서 6·25 때의 ‘부역’ 행위에 대한 조사도 병행하자는 맞불이 붙는가 싶더니, 식민지 시대의 좌파 독립운동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논의로 새로 번진다. 이렇게 갈팡질팡하는 ‘내전’을 틈타 중국은 고구려사로, 일본은 다시 우익 교과서 채택으로 한국을 압박한다. 이 종착점 없는 내우외환(內憂外患)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과거사 정리 해야하는 이유▼

일반적으로 내우가 외환을 인도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내우를 먼저 합리적으로 해결해야 할 터인데, 과거사 정리가 최소의 배제를 통한 최대의 통합, 즉 국민 대통합에 목적을 두어야 한다는 인식을 우리 모두 확인하고 공유하는 것이 핵심이다. 과거사 정리는 과거로 돌아가자는 게 아니라 과거를 터는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대통합의 힘으로 미래로 함께 나아가기 위한, 고통의 축제이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이 경제가 어려운 때에 과거사 정리로 풍파가 일어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없지 않지만 이는 단견이다. 과거사 정리는 오히려 위기의 시대를 돌파하려는 충정에서 기원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태평성대의 소산이 아니다. 고려가 직면한 안팎의 위기를 배경으로 이 역사서들이 출현했다는 점에 유의하자. 이런 고려의 역사의식이 계승되면서 조선 왕조는 바로 개국 초에 고려사 정리에 착수하여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편찬하였던 것이다.

이 점에서 건국 50년이 넘은 현재까지도 정사(正史) 체제의 조선왕조사와 식민지시대사를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주요한 원인은 광복 이후 한반도가 분단된 데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분단이 광복을 자주적으로 이루지 못한 내부요인에도 말미암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흔히 제2차 세계대전 후 나치 부역자들을 엄격하게 처리한 프랑스의 예를 들어 친일파들을 제대로 숙정하지 못한 한국과 비교하곤 한다. 그런데 한국은 프랑스와 많이 다르다. 나치의 프랑스 점령은 고작 4년이었고 더구나 남부 프랑스는 비록 괴뢰정권일망정 비시정부가 관할하고 있었다. 더욱이 결정적인 것은 드골이 이끄는 자유프랑스군이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프랑스를 해방한 점이다. 나치 점령기 프랑스 국내의 레지스탕스운동은 또 얼마나 활발하였던가? 바로 이 해방세력이 전후에 프랑스공화국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나치 부역자들에 대한 처리가 신속하고 단호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일제의 장기간에 걸친 혹독한 지배 아래 민족해방을 위한 간난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는 결국 미소연합군에 의해 분단된 채 광복을 맞았다. 그래서 우리에게 광복은 함석헌(咸錫憲)의 말대로 ‘도둑처럼 찾아온 것’이었다. 광복군이 전혀 참여하지 못한 채 맞은 일제의 항복 소식에 김구(金九)가 통탄했다는 일화는 상징적이다. 분할점령의 조건을 창조적으로 극복한 통일국가 건설이 아니라 분단정권 수립으로 귀결된 것은 설상가상의 악재다. 이 분열 속에 남북의 체제경쟁이 가속화되었으니 친일문제를 핵으로 하는 식민지시대사 정리가 흐지부지되고 말았던 것이다.

▼21세기로 가는 출구 열어야▼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먼저 과거사 정리가 왜 이처럼 지연되었는지 그 내부요인들을 침통하게 응시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자기를 치는 심정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식민지시대와 분단시대로 이어진 20세기의 한반도사를 넘어 21세기의 통일시대로 우리 모두 함께 나아갈 수 있을까?

통일시대의 미래를 준비하는 정성스러운 안목으로 식민지시대사를 정리함으로써 21세기로 가는 출구를 열자. 20세기 한국사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다짐과 결의야말로 그 악몽에서 솟아난 역사의 망령들을 천도(薦度)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최원식 인하대 교수·한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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