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이머전스’…시스템이 스스로 작동하는 ‘창발성의 법칙’

  • 입력 2004년 4월 23일 17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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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머전스/스티븐 존슨 지음 김한영 옮김/328쪽 1만4900원 김영사

세계무역기구(WTO) 반대 시위가 격렬했던 1999년의 시애틀. 시위대의 특징은 ‘분산된 조직’이라는 것이었다. 반(反)나이키 비판가, 무정부주의자, 급진적 환경보호론자, 노동조합 등 색깔이 제각각이었던 이들은 모임을 개최할 시간이 되면 “모든 분파를 웹으로”라고 외쳤다. 그 즉시 그들이 선 자리는 거리의 회의실이 됐다. 마틴 루서 킹이나 차베스 같은 ‘위로부터의 지도자’는 없었다. 그러나 ‘전 세계 자본주의’라는 분산네트워크에 맞서 전투를 벌이기에 스스로 분산네트워크가 되는 것보다 더 유리한 방법은 없었다.

웹진 ‘피드(feed)’의 공동 창간자이자 뉴스위크가 선정한 ‘인터넷상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50인’ 중의 한 사람인 저자는 2001년 발간된 이 기념비적인 저작에서 시애틀에서 벌어졌던 것과 같은 ‘운동의 법칙’에 주목했다. 사회운동을 지칭하는 협의의 운동이 아니다. 나무껍질에 붙어 자라는 점균류부터 상대의 마음을 읽기 위해 애쓰는 데이트하는 두 남녀, 팀 단위로 자율적인 경영을 펼쳐나가는 첨단기업, 그리고 정치영역에 이르기까지 이 운동의 법칙은 편재(遍在·ubiquity)한다.

저자가 이 운동의 법칙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아니다. 1960년대 하버드대 출신 물리학박사 에블린 폭스 켈러는 정원에서 자라는 점균류의 특이한 생존방법에 관심을 두게 됐다. 환경조건이 나쁠 때는 무수히 많은 세포들이 모여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어 생존하다가, 조건이 좋아지면 단세포로 돌아가기를 반복하는 이 생명체에서 켈러는 △단순한 행위자들로부터 놀라울 만큼 복잡한 구조물이 만들어지는 ‘자기조직화’가 가능하며 △그 과정은 똑똑한 수뇌부가 아니라 비교적 우둔한 대중이, 하향식이 아닌 상향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이러한 질서창조가 가능한 이유는 각 개별행위자가 네트워크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밝혔다. 일단의 흰개미 무리가 사람도 쌓기 어려운 거대한 탑 모양의 둥지를 만드는 것처럼 저차원의 법칙에서 고차원의 복잡계로 발전하는 것. 이를 두고 저자는 창발성(Emer-gence)이라고 부른다.

“이런 자기조직화에는 통제가 결여돼 있다. 이를 염려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나 창발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시스템에 대한 제어를 포기함으로써 시스템이 스스로 작동하고 아래로부터 학습하게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사람들의 새로운 행동양식과 그로 인해 빚어지는 변화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사람이 있다면 필독해야 할 책이다. 원제 ‘Emergence(2001).’

정은령기자 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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