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유자효, '아름다운 세상'

  • 입력 2003년 11월 11일 18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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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곳에서는 살육이 저질러지고 있겠지만은

그래도 세상은 아름다운 곳

지금 이 순간에도 모두가 떠나버린 고독에 몸을 떠는

사람들이 있겠지만은

그래도 세상은 아름다운 곳

지금 이 순간에도 파멸을 위한 악의 씨가 뿌려지고 악의 꽃들이

재배되고 있겠지만은

그래도 세상은 아름다운 곳

당신이 있는 곳은 어디나 세상의 중심

당신의 생명이 끝날 때까지 당신은 세상의 유일한 선택

세상은 결코 당신을 버리지 않으니

당신이 떠난 뒤에도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운 곳

-시집 '아쉬움에 대하여'(책만드는집)중에서

캄캄한 밤중 손전등에 비친 낯선 그림자처럼 어두운 세상의 벽면에 일렁거리는 폭력과 광기에 주눅들 때에 누군들 삶이 두렵고, 비천해지는 때가 왜 없겠는가. 스치는 바람조차 날카로운 적의로 살을 저미고 뼈를 후빌 때, 그러나 온 우주가 당신의 배경인 것을 생각해 보라.

저 하늘의 모든 별과 저 들판의 모든 꽃이 오직 당신 하나의 배경인 걸 생각해 보라. 재산을 잃고, 직장을 잃고, 진학을 잃고, 신분증을 잃고, 노숙을 해도 절대로 잃어버릴 수 없는 ‘나’. 가장 지독한 절망과 슬픔과 분노조차도 나를 위한 장치인 것을 생각해 보라.

천둥, 번개, 벼락도 가냘픈 제비꽃 하나의 배경인 걸 떠올려 보라. 서리, 눈, 우박도 매화꽃 하나의 배경인 걸 생각해 보라. 슬픈 이여, 세상의 모든 슬픔보다도 더 깊은 슬픔이 될 자신 없으면 슬그머니 울다가 웃자. 돌잔치의 주인공 아이처럼.

반칠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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