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포커스]전세계 누비는 자원봉사 청년 이승복씨

  • 입력 2003년 11월 4일 18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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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복씨가 애장품인 네팔북을 품에 안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미국의 명문대를 졸업한 이민 1.5세로 고국에 남았더라면 병역 의무를 졌을 기간 동안 네팔의 오지에서 평화봉사단 활동을 자청했던 그는 개도국을 지원하는 국제기구 활동에 종사하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다. -안철민기자
이승복씨가 애장품인 네팔북을 품에 안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미국의 명문대를 졸업한 이민 1.5세로 고국에 남았더라면 병역 의무를 졌을 기간 동안 네팔의 오지에서 평화봉사단 활동을 자청했던 그는 개도국을 지원하는 국제기구 활동에 종사하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다. -안철민기자
《‘참 자유로운 청년.’

자원봉사에 청춘을 건 이승복(李丞馥·26)씨에게서 받은 첫 느낌이다. 자원봉사(Volunteer)라는 말 자체가 ‘자유의지’를 뜻하는 라틴어 볼룬타스(Voluntas)에서 나왔기 때문일까.

길지 않은 인생이지만 이씨의 봉사경력은 자못 화려하다. 미국시민권자인 그는 평화봉사단원(Peace Corps)으로 선발돼 2000년 8월부터 2년3개월 동안 네팔의 시골마을에서 교사생활을 했고, 그 전후로도 미국과 한국 등 세계 이곳저곳에서 남을 도울 길을 찾고 있다.》

이런 이씨가 봉사활동에 빠지게 된 계기는 97년 유럽 배낭여행 때. 세상 어디서나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에게 힘이 됐을 때의 뿌듯함을 경험한 덕이라고 한다.

“스위스 루체른에서 만난 한국대학생이 여행 중에 머리뼈를 다쳤습니다. 수술을 받고 치료하는 2주일 동안 그의 곁에 머물렀지요. 그 뒤 독일여행을 마치고 루체른에 다시 갔더니, 이번엔 한 여대생 여행객이 배가 아프다고 해 병원에 데려가니 담석증이었어요. 또 그 학생이 퇴원할 때까지 간호했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었지만 이렇게 가슴 가득 보람을 안게 된 이씨는 그 뒤 학기 중엔 로스앤젤레스 ‘노숙자의 집’에서 아침을 만들어 나눠주고 방학 때는 한국에 들어와 보육원과 장애인센터 일을 도왔다.

UC버클리대학 기계공학과 졸업 직전에는 평화봉사단에 자원했는데, 이를 위해서 99년 미국시민권을 얻었을 정도다. 평화봉사단은 개발도상국의 교육 농업 무역 기술 향상과 위생 개선 등을 위해 미국 정부가 자국의 청년들을 훈련시켜 파견하는 단체. 현재 69개국에서 6700여명이 활동하고 있다.

“부모님은 무모한 짓 하지 말라고 말리셨죠. 하지만 병역 의무를 지지 않는 대신 봉사활동을 꼭 해야겠다고 우겼죠. 한국 국적을 포기했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사회를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래서 떳떳합니다.”

2000년 8월, 40명의 평화봉사단원과 함께 찾아간 네팔은 1인당 국내총생산이 1400달러에 불과해 유엔이 선정한 ‘지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였다. 첫 발령지는 테헤라툼의 한 시골 초등학교. 버스를 내려서도 3, 4시간 걸어 들어가야 했고 전기도 없는 히말라야의 오지마을이었다. 이씨는 수학과 영어를 가르쳤다.

“모든 게 엉망이었어요. 학생들은 숙제가 뭔지도 모르고 시험 중에 커닝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죠. 현지 선생님들이 때려야만 말을 들었어요.”

의욕에 넘쳤던 이씨는 처음엔 ‘교육 시스템을 어떻게 바꿔야 할까’를 고민했다. 그러나 곧 학생들을 이해하게 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좋은 교육을 하자’고 마음을 바꿨다. 아이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이해하는 법을 배웠던 것.

학생들과 친해진 2001년 12월, 마오쩌둥(毛澤東)주의 혁명을 주장하는 반군이 테헤라툼까지 들어왔을 무렵이다. 세미나 참석차 수도인 카트만두에 나갔던 이씨는 ‘내전위험지역’으로 지정된 테헤라툼에 다시 들어갈 수 없었다.

그 뒤 트레킹으로 유명한 북쪽 산악지대 ‘무스탕’에서 1년간 일한 이씨는 2002년 11월 평화봉사단 임기가 끝난 뒤에야 다시 테헤라툼을 찾을 수 있었다.

“하숙하던 집에 가니 제 방을 손끝 하나 안 대고 그대로 두었더군요. 제가 작성 중이던 교육계획안이 그대로 책상 위에 놓여있는 것을 보고 감동했습니다. 그들은 제가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믿고 기다렸던 거죠.”

이렇게 자신을 믿고 기다려주는 그곳 사람들에게 그 자신도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 그래서일까. 지난해 12월 귀국한 이씨는 요즘 ‘안양 이주노동자의 집’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활동에 눈코 뜰 새가 없다. 이곳에는 네팔인 노동자가 많아 그가 현지에서 익힌 네팔어가 무척 요긴하기 때문이다.

“현지에서 만난 네팔인들은 무척 순박하고 바깥세상을 잘 모른다는 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나와 있는 네팔인들은 고생을 많이 한 탓인지 마음이 상당히 각박한 편입니다. 우리 정부, 궁극적으로는 우리 국민들이 외국인 노동자들을 보호하지 않는 것은 물론 ‘사람 대접’을 하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이 밖에도 틈틈이 도울 곳을 찾는 그의 눈길은 무척 바쁘다. 올 9월에는 태풍 ‘매미’ 피해 소식을 듣고 무작정 강원도 삼척을 찾아가기도 했다. 요즘 그의 포부는 앞으로 유네스코나 유엔아동기금(UNICEF) 같은 기구에서 일하는 것. 이를 위해 국제개발 프로그램 등을 공부하고 있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같은 길을 갈 겁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제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배웠어요. 어디를 가든 헤쳐 나갈 수 있는 자신감도 얻었고요. 제가 그들에게 준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얻은 셈입니다.”

정재윤기자 jaeyuna@donga.com

▼이승복씨는 ▼

1977년 서울 생

1988년 서초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고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민

1996년 밴나이스 고교 졸업, UC 버클리대 기계공학과 입학

1997년 유럽 배낭여행 중 봉사활동에 관심을 갖게 됨

1998년 슬로바키아, 폴란드, 헝가리 등에서 10주 동안 워크캠프 참여

1999년 미국 시민권 취득

1999년 동아제약 주최 ‘국토대장정’ 참여

2000년 대학 졸업

2000년 8월∼2002년 11월 네팔에서 미국 평화봉사단원(Peace Corps)활동

2003년 3월∼‘안양 이주노동자의 집’에서 봉사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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