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오탁번, '잠지'

  • 입력 2003년 9월 29일 18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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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산소 가는 길에

밤나무 아래서 아빠와 쉬를 했다

아빠가 누는 오줌은 멀리 나가는데

내 오줌은 멀리 안 나간다

내 잠지가 아빠 잠지보다 더 커져서

내 오줌이 멀리멀리 나갔으면 좋겠다

옆집에 불 나면 삐용삐용 불도 꺼주고

황사 뒤덮인 아빠 차 세차도 해주고

내 이야기를 들은 엄마가 호호호 웃는다

-네 색시한테 매일 따스한 밥 얻어먹겠네

-시집 '벙어리 장갑'(문학사상사)중에서

손자의 일기장인가? 환갑 진갑 다 지난 저이의 유년인가? 아냐 아냐, 누구보다도 지적 재산권 소중히 여길 글쟁이인데 무단으로 손자를 훔칠 리 없지. 저건 아직도 다 안 자란 오탁번 어린이가 분명하다.

세상엔 시난고난 늙어서 고목 삭정이가 되는 사람이 있고, 평생을 늙어서 말랑말랑한 아이가 되는 사람이 있다.

나도 가끔 밤 오줌은 마려운데 잠이 무거울 때, 잠지 홀로 ‘재크의 콩나무’처럼 무럭무럭 자라 방문을 밀고 거실을 지나 밤새 목마른 변기 입에 콸콸콸- 시원한 오줌 자리끼 들이붓는 꿈을 꾼 적이 있지.

깊은 가을밤 저 아이네 집에 마을갔다가 소름 오소소 돋도록 냉수 한 대접씩 마시고, 둘이 한 요 깔고 밤새 대동여지도나 그렸으면. 어른들 불호령에 깨어 함께 키 쓰고 쭈뼛쭈뼛 왕소금이나 얻으러 갔으면. 아니 아니, 세상 ‘불난 집(火宅)’ 모두 적셔 줄 동심(童心)이 되었으면.

반칠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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