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리포트]영화화되는 엘리자베스 머레이 감동실화

  • 입력 2002년 10월 24일 16시 28분


엘리자베스 머레이./동아일보 자료사진
엘리자베스 머레이./동아일보 자료사진
‘홈리스, 하버드, 할리우드’ 세 단어가 들어가는 짧은 글짓기 시험을 치르면 어떤 답이 나올까. 이달 초 하버드대학신문 ‘하버드 크림슨’ 1면엔 하나의 정답이 소개됐다. 기사 제목은 ‘홈리스에서 하버드로 할리우드로’.소설보다 더 픽션같은 실화다.

엘리자베스 머레이(21)는 뉴욕의 브롱크스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모두 마약 중독자. 리즈(엘리자베스의 애칭)의 어린 시절을 간단하게 묘사하는 세 개의 단어가 있다. 배고픔, 사회복지 수표, 코카인 거래. 부엌엔 부모가 사용한 주사기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잘못 찔러 피를 흘린 흔적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집안에 더 이상 팔아치울 물건이 없게 되자 엄마는 리즈의 어린 동생 스웨터도 들고 나갔다. 아홉 살 때 리즈는 식품점 물건을 나르고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어주고 돈을 벌었다. 집안의 유일한 소득이었다.

엄마는 열살이 된 리즈에게 나지막히 말해주었다. “나는 에이즈에 걸렸단다.” 5년 뒤인 1996년 엄마는 세상을 떠났고 남은 가족은 홈리스가 됐다. 리즈는 결심했다. ‘엄마처럼 살진 않겠어.’ 리즈가 간 곳은 학교였다. 성적은 형편없었지만 다행히 공립학교에서 받아주었다. 지하도 계단에서 숙제를 했다. 공부하는 것이 너무 좋았다. 남보다 두 배로 공부한 끝에 4년 과정을 2년 만에 마치고 1999년 졸업장을 받았다.

맨해튼 거리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홈리스들. 사회운동가들은 뉴욕시의 홈리스가 불황기였던 1980년대에 육박하는 수준으로 늘었다고 주장한다./동아일보 자료사진

“어느 날 거리에서 잡지를 주워 읽는데 배우 짐 캐리의 기사가 있더군요. 그 역시 홈리스 출신으로 길가 텐트에서 온 가족이 함께 생활했대요. 그는 ‘손을 내밀어 잡으면 나의 것이 될 수 있다’고 말했어요. 그것을 읽고 ‘무엇이든 노력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다’는 점을 배웠어요.”

뉴욕타임스를 읽어본 적이 없지만 리즈는 이 신문사의 장학금을 신청했다. 역경을 딛고 공부하는 뉴욕 학생들에게 대학 4년간 매년 1만2000달러씩 지원하는 이 장학금은 리즈에게는 큰 빛이 되었다. 뉴욕타임스에서 리즈의 이야기를 읽은 독자들은 20만달러를 기부했다. 리즈는 대학 문을 두드렸다. 하버드였다.

“고교 시절 하버드를 방문해 캠퍼스를 둘러보았어요. ‘내가 진심으로 원한다면 이것이 왜 나의 것이 될 수 없겠나. 여기 있는 사람들이 나와 무엇이 다른가’라고 속으로 다짐했죠. 하버드 합격통지서를 받으니 날개를 단 기분이었어요.”

2000년 신입생으로 하버드 캠퍼스를 밟은 그녀의 이야기는 이제 영화로 만들어진다. 라이프타임 텔레비전측이 잡은 제목은 ‘홈리스에서 하버드로’이며 내년 봄 개봉 예정이다. 이 회사의 트레보 월튼 수석부사장은 “도저히 탈출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되는 세상에 갇혀 있다고 느끼는 모든 사람들에게 리즈는 귀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리즈 역은 ‘아메리칸 뷰티’의 도라 버치(20)가 맡는다. 리즈는 “내가 좋아하는 도라가 나를 연기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멋진 일이 될 것”이라며 반겼다. 리즈는 할리우드를 방문해 도라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버드대 기숙사 쿠리어하우스에서 살고 있는 리즈는 요즘 자신의 과거를 책으로 쓰고 있다. 하이페리온 출판사와 계약을 했다. 학교에서는 초기엔 인문학 강의를 많이 들었고 요즘은 전공분야를 결정하기에 앞서 과학 강의를 들으며 관심영역을 찾고 있다.

리즈의 아버지는 마약을 끊었지만 에이즈가 발병했다. 그래도 마약중독자 재활센터를 찾아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면서 새로운 삶을 산다.

다시 뉴욕. 홈리스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맨해튼 남쪽 유니온 스퀘어를 오가는 비즈니스맨들의 눈에 띄는 홈리스는 요즘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있다. 범죄와의 전쟁에 나섰던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이 ‘홈리스 무조건 체포’를 명령한 직후 없어진 것 같던 홈리스들이 거리의 벤치 뒤에서 슬금슬금 나오고 있다. 그들 속에서 또 한 명의 ‘리즈’가 책을 붙잡고 공부하고 있을까.

린다 깁스 뉴욕시 홈리스대책국장은 “경찰을 통해 알아보니 숫자가 늘어난 것이 아니라 홈리스들의 행태가 달라졌다고 한다”면서 “올 겨울 센서스를 벌여 홈리스의 정확한 숫자를 파악할 예정”이라고 말했다고 뉴욕타임스는 최근 전했다.

그러나 사회단체 등은 미국 경기가 여전히 침체국면에 있고 홈리스에 대한 지원이 계속 줄었다면서 우려하고 있다. 시 보호시설에 수용돼 있는 독신자가 하루 평균 7728명으로 20년 만에 최대이며 거리의 무료급식소가 홈리스가 가장 많았던 1980년대만큼 붐빈다는 점을 이들은 지적하고 있다. 세계 최대의 도시 뉴욕이 안고 있는 오래된 과제다.

뉴욕=홍권희특파원 koni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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