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의 고향을 찾아서(15)]우정총국과 개화파

  • 입력 2002년 7월 28일 17시 10분


원래 있던 자리에서 70m 북서쪽으로 옮겨진 독립문 [사진제공=오철민 녹두스튜디오 대표]
원래 있던 자리에서 70m 북서쪽으로 옮겨진 독립문 [사진제공=오철민 녹두스튜디오 대표]
‘그 날’은 우정총국(郵征總局) 건물이 완공돼 축하 연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우정총국은 해외를 시찰하고 돌아온 홍영식의 건의로 근대식 우편 사무를 취급하기 위해 1884년에 설치한 관청이었다.

12월4일 밤, 일부 개혁파들은 이날의 떠들썩한 분위기를 이용해 부근 민가에 불을 지르고 왕궁 안팎에 폭약을 터뜨리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고종을 ‘포로’로 삼았다. 이들은 이런 혼란을 틈타 정적들을 살해하고 정권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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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金玉均) 33세, 홍영식(洪英植) 29세, 서광범(徐光範) 25세, 박영효(朴泳孝) 23세, 서재필(徐載弼) 18세. 당시 갑신정변을 주도한 이 젊은 혁명가들의 정권은 3일만에 청나라 군대에 의해 축출됐다. 국내에 지지세력도 별반 없는 상황에서 일본의 지원만 믿고 거사를 했던 이들은 청나라 군대의 공격에 무기력하게 물러서는 일본군과 함께 피신해야 했다. 당시 서울에 주둔하던 일본군의 수는 약 120명, 이들이 감당해야 할 청나라 군대는 10배가 넘는 1500여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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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법개화파와 시무개화파

이 날의 완공 축하연 이후 우정총국은 우편 업무를 담당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현재 서울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 입구에서 안국동 쪽으로 100m 가량 떨어진 자리에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있는 이 곳은 우리나라 근대 우편 사업의 발상지다. 당시 불탔다는 민가 대신 새로 지어진 건물들로 빼곡이 둘러싸여 있는 이 역사적 장소는 곧 정비사업을 통해 시민들이 돌아볼 만한 유적지로 가꿀 계획이다.

한국 근대 우편 사업의 발상지인 우정총국은 완공 축하연에서 벌어진 갑신정변으로 인해 우편 업무에는 사용되지 못했다 [사진제공=오철민 녹두스튜디오 대표]

갑신정변을 주도한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해 10년 간 방랑 끝에 1894년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가 자객에게 살해됐고, 해외로 탈출하지 못한 홍영식은 체포돼 처형됐다. 그러나 개화파들에게 남겨진 역사의 임무는 계속됐다. 서광범, 박영효, 서재필은 1894년 갑오개혁을 계기로 다시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새로운 사회체제를 모색하던 1880∼1890년대에 개화를 추진한 집단은 크게 변법개화파(變法開化派)와 시무개화파(時務開化派)로 나눠 볼 수 있다. 변법개화파는 폭력으로라도 보수파를 몰아내고 빠른 시간 내에 현실정치에서 개화를 실현하고자 했던 갑신정변의 주역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정세판단의 미숙과 성급한 시도로 개혁에 실패했고, 이로 인해 오히려 정치 상황이 보수적 분위기로 회귀하는 상황에서 시무개화파라는 보다 온건한 세력이 전면에 등장했다.

그런데 변법개화파와 시무개혁파의 사상적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 박규수(朴珪壽 ·1809∼1876)에게로 이어진다. 박규수는 조선후기 북학파 학자였던 박지원(朴趾源)의 손자이자 당시 노론(老論)의 실력자로서 새로운 문물과 사상에도 밝았다. 서울 종로구 재동 부근 그의 집 사랑방에는 시대를 고민하는 쟁쟁한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1860년대부터 김윤식(金允植) 김홍집(金弘集) 오경석(吳慶錫) 등이 이 사랑방을 찾았고, 뒤이어 김옥균 유길준(兪吉濬)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이 가담했다.

갑신정변의 4주역. 왼쪽부터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홍영식 [동아일보 자료사진]

이 사랑방에서의 만남을 통해 이들은 이익 홍대용 박지원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실학사상을 접하며 함께 토론했고, 이를 바탕으로 시대의 변화에 대처할 길을 찾으며 개화사상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들의 고민은 서구의 물질문명을 빨리 수용해 조선의 자주적 발전을 이루는 것이었지만, 오랜 유교문화를 계승해 온 문화민족의 자부심도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에 전통의 계승과 새로운 문화의 수용이라는 두 종류의 과제를 어떻게 동시에 수행할 것인가 하는 것은 개화론자들만의 고민은 아니었다. ‘독립신문’ ‘매일신문’ ‘황성신문’ 등의 지면과 종로거리의 만민공동회에서 공개적으로 논의된 것이 바로 이 문제였고, 독립협회가 조선의 영구독립을 선언하며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자리에 ‘독립문’을 세운 것도 이런 고민의 결과였다.

간도로 집단 이주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안동 유림들, 유교 전통의 윤리적 자부심을 기반으로 서구의 사상과 과학기술을 익히자고 주장했던 위정척사파 유생들, 가족주의와 패거리주의를 비판하며 유교의 근본이념으로 돌아가 실용적인 개화를 실천할 것을 주장한 계몽주의자들….

역사가 깊을수록 전통의 짐은 무겁지만, 그 전통의 부담은 현재와 미래에 우리가 부딪혀야 할 현실의 고민을 덜어 줄 교훈과 경험의 보고이기도 했다.

야심만만했고 당시 가장 과격한 개혁을 주장했던 김옥균은 이제 주검으로 돌아와 충남 아산에 묻혀 있다. 깨끗이 단장된 그의 묘는 그가 우리 역사에 준 충격에 비해 너무도 고요하다. 시간은 그렇게 흐른다. 그의 실패는 과거와의 지나치게 급진적인 단절이 시간과의 단절일 뿐 아니라 자신이 뿌리내리고 있는 사회와의 단절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통의 계승과 새로운 문물의 수용이라는 이들의 고민은 여전히 우리의 고민이다. 서구적 시각과 논리에 더 익숙한 눈으로 과거를 바라보며 전통의 계승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현재의 자신과 반대 방향, 즉 우리의 전통적 시각과 논리에 더 익숙한 눈으로 서구적 근대화를 시도했던 이 시기 지식인들에게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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