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딩크 수기]<1>제2의 조국 대한민국

  • 입력 2002년 7월 1일 18시 46분


히딩크 감독은 '한국민 모두와 독자에게 감사한다'는 문구를 넣어 본보 취재진에게 사인을 했다. - 이종승기자
히딩크 감독은 '한국민 모두와 독자에게 감사한다'는 문구를 넣어 본보 취재진에게 사인을 했다. - 이종승기자
《거스 히딩크 감독(56)이 한국에 첫발을 디딘 지 1년반. 그간 한국인들은 그의 말 한마디, 몸짓 하나에 울고 웃었다. ‘신드롬’으로 묘사된 히딩크 열풍이 전국을 휩쓰는가 하면 ‘오대영’이란 수치스러운 별명이 그의 발 앞에 던져지기도 했고 ‘4강 영웅’으로 추대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그는 이 변덕스러운 바람에 한순간도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제 갈길만 걸어왔다. 그의 애창곡 ‘마이 웨이(My way)’처럼…. 히딩크 감독은 한국과 한국축구에 대해 어떤 추억을 안고 이 땅을 떠날까. 지난달 29일 터키와의 2002한일월드컵 3, 4위전을 끝으로 한국축구대표팀 감독 임기를 끝낸 그는 무거운 짐을 벗은 듯 홀가분한 표정으로 자신의 짧지 않은 한국 생활을 속시원히 털어놨다. 》

터키와의 월드컵 마지막 경기가 끝난 후 붉은 물결로 가득한 관중석을 올려다봤다. 가슴 깊은 곳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치솟았다.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을 꺾고 승승장구하던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가가 뜨듯해짐을 느꼈다.

이제 한국은 나에게 그 어떤 것보다도 소중한 존재다. 한국을 사랑한다. 당당히 제2의 조국이라 말할 수 있다. 앞으로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한국은 영원히 내 가슴 속에 남아 있을 것이며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글 싣는 순서▼

- [히딩크 수기]<1> 제2의 조국 대한민국
- [히딩크 수기]<2> 한국축구와의 인연
- [히딩크 수기]<3> 컨페더컵-골드컵 시련딛고
- [히딩크 수기]<4> 평가전 잇단 선전 희망을 봤다
- [히딩크 수기]<5> 16강 약속 지키다
- [히딩크 수기]<6> 8강에 이은 4강 신화

많은 사람들이 내가 한국팀 감독으로서 한 일을 ‘히딩크식 경영 혁신’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간에 벌어진 현상에 ‘히딩크 신드롬’이란 말을 갖다 붙이기도 한다. 나에 대해 과도한 평가를 해주는 한국 국민에게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나도 한 인간에 불과하다. 나도 실수를 한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영웅심’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한국팀 감독으로서 한 일은 지난 몇 년간 해오던 일이다. 선수 개개인의 자기 계발을 도왔을 뿐이다.

나는 돌려서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항상 솔직하고 직접적으로 말한다. 나는 선수 개개인에게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솔직하고 직접적인 화법으로 이야기한다. 그것이 선수 개개인의 재능을 극대화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믿는다. 그래야 선수들의 ‘화학적 결합’을 이끌어내 팀의 역량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한 일이다.

당부하고 싶은 게 하나 있다. 한국 국민들이 인내심을 가져 줬으면 좋겠다. 앞으로 새 감독이 지휘봉을 잡게 되면 새로운 팀을 구성할 수 있는 시간을 줘야 한다. 팀을 구성하고 새 기반을 만들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한국팀이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앞으로도 꾸준히 노력한다면 계속 훌륭한 팀으로 성장할 것이다. 아울러 올림픽이나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새로운 선수를 발굴하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뛰어보지 못한 선수는 경험을 얻을 수 없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선수든 팀이든 인내심을 갖고 지켜봐야 한다.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다. 내가 ‘완벽주의자’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팀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 한국 선수들도 그동안 너무 열심히 뛰어줬다. 하지만 마지막 게임도 이겼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처음 몇 분 동안 수비의 움직임이 맘에 안 들었다. 축구는 경기의 흐름을 타는 것이다. 처음에 허둥대지 않고 제 위치를 지키다 리듬을 타다보면 골을 넣게 되고 훌륭한 경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터키와의 경기는 그런 면에서 안 좋았다.

그렇다고 불만이 있는 건 아니다. 전반적으로 한국팀의 경기에 대해 만족한다. 무엇보다도 내가 전에도 말했던 것처럼 전세계에 충격을 준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한다. 남미, 북미, 유럽의 많은 나라 사람들이 나에게 한국팀이 펼친 경기를 보고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전화나 e메일을 보내왔다. 한국 사람들의 열띤 응원과 한국팀의 수준 높은 경기력에 놀랐다는 내용들이다. 나는 터키와의 경기에 만족하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은 한국팀의 공격적인 플레이를 즐겼다고 전해왔다.

내가 한국팀에 대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조금 경기가 안 풀릴 때도 물러서지 않는 모습이다. 그들은 금방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싸웠다. 한국 사람들이 그런 것 같다.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다시 일어나 시작한다. 한발짝 물러선 뒤에도 다시 시작한다. 한국팀도 그랬다.

내가 한국팀 감독을 맡으면서 생각한 건 미래였다. 그저 월드컵에 나가 승리를 이끌어내는 것 이상을 이뤄내겠다는 생각이었다. 한국팀의 전반적인 경쟁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건 쉬운 일은 아니다. 한국팀이 다른 팀들과 다른 뭔가를 갖춘 팀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기초 경쟁력을 키우게 되면 세계 어느 나라 팀과도 맞서 싸울 수 있는 역량이 생긴다. 특히 경기를 하다보면 힘들 때가 있게 마련이다. 그럴 때 다시 일어나 싸울 수 있어야한다. 그러려면 튼튼한 기초가 있어야 한다.

월드컵 4강 성적보다도 내가 더 뿌듯하게 생각하는 건 바로 이런 면에서 거둔 성과들이다. 이제 한국 선수들은 아무리 강한 상대를 만나도 움츠러들지 않는다. 주눅들지 않는다. 평소 하던 대로 개인의 역량을 모두 펼쳐 보이며 멋진 경기를 이끌어낼 수 있게 됐다. 상대를 존경하되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이 바로 한국축구의 미래다.

간혹 주위 친구들이 한국에 온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느냐고 물어보곤 했다. 지금 나는 아무런 후회도 없다. 오히려 행복하다. 앞서 말했지만 나는 한국팀이 장기적으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주려 노력했고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본다. 이것은 나의 축구인생에서 매우 기억에 남는 성과다.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매우 유용한 경험이었다. 나는 한국에 와서 많은 친구들을 만나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나에게 보여준 우정을 오랫동안 간직할 것이다.

정리〓배극인기자 bae2150@donga.com

신치영기자 higgledy@donga.com

▼명장 히딩크 ‘한국과 함께 한 18개월’말…말…말…

▽한국팀을 기술적으로 향상시킬 자신이 있다. 2002년 월드컵에서는 큰 변화가 있을 것이다(2000년 12월17일 부임 후 입국 일성).

▽모든 면에서 향상돼야 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특히 체력적인 면에서 강해져야 한다(2001년 1월27일, 파라과이전에서 첫승을 거둔 뒤)

▽세계적인 강팀과의 격차를 실감한 이상 이제부터는 그 격차를 줄여나가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2001년 5월31일,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프랑스에 0-5로 대패한 뒤)

▽반드시 이긴다는 잔인한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때론 사고뭉치가 필요한데 아무도 악역을 떠맡지 않는다(2001년 8월16일, 체코에 0-5로 대패한 뒤).

▽내가 선택한 길이 옳았고 계속 나의 길을 가겠다.(2001년 11월10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크로아티아를 2-0으로 누른 뒤)

▽킬러 본능이 필요하다. 이 나이에 내가 골을 넣으란 말이냐(2002년 1월23일, 북중미골드컵 쿠바전을 마치고).

▽약팀과의 승수쌓기는 나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어려운 길을 택했다. 궁극적으로 한국축구에 기여한 인물로 기억되고 싶다(2002년 2월14일 북중미골드컵 우루과이전을 마친 뒤).

▽월드컵을 50일 남겨둔 지금 16강 가능성은 50%다. 매일 1%씩 올리면 월드컵 개막 때는 100%가 될 것이다(2002년 4월10일 월드컵 D-50일 기자회견에서)

▽내가 대표팀을 맡을 때 일부 사람은 월드컵에서 1승만 거둔다면 다 이룬 것이라는 말까지 했을 정도다. 팬들의 성원을 바탕으로 거둔 이 첫 승리는 한국축구가 한 단계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2002년 6월4일 폴란드전을 마치고)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2002년 6월15일, 이탈리아와의 16강전 승리에 대한 욕심을 나타내며).

▽지면 집으로 가야 한다(2002년 6월22일, 스페인전을 이긴 뒤 외신기자들이 심판문제를 거론하자).

▽요코하마에 가지 못해 아쉽다. 그러나 선수들이 자랑스럽다(2002년 6월25일, 독일과의 준결승전에서 0-1로 패한 뒤)

▽한국은 짧은 시간에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당신들(한국인)이 최고다(2002년 6월29일, 터키전을 마치고열성적으로 응원해준 팬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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