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의 고향을 찾아서 4]정도전의 사상적 배경

  • 입력 2002년 5월 12일 17시 28분


역사상에서 정도전의 ‘불씨잡변(佛氏雜辨)’만큼 철저하게 불교를 비판한 글은 찾기 어렵다. 또한 이 글만큼 불교를 편파적으로 매도한 글도 찾기 어렵다.

그에 따르면 만물이 태어나고 죽는 것은 기(氣)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죽은 후에 윤회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착한 일을 해서 복을 받고 악한 일을 피해서 화를 입지 않도록 하는 것은 심성수양을 통해 자발적으로 이뤄져야 하는 것인데, 불교는 인과응보설(因果應報說)을 가지고 겁을 줘서 사람들이 득실을 따지며 억지로 착하게 살도록 한다. 아마도 이런 주장에 쉽게 승복할 불교도는 거의 없을 것이다.

물론 당시 불교의 권력유착과 도덕적 타락, 사회에 대한 무책임성 등에 대한 정도전의 비판에는 귀기울일 만한 내용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그의 비판 중 많은 부분이 철저히 유교적 입장에서 불교를 난도질하는 것이었다.

이뿐이 아니다. ‘심기리편(心氣理篇)’만큼 불교와 도교와 유교를 단순 명료하게 비교한 글도 찾기 어렵지만, 또한 이 글만큼 자기 주장을 펼치기 위해 다른 견해를 왜곡한 경우도 드물다.

불교는 심(心)을 중시하고 도교는 기(氣)를 중시하지만, ‘심’이나 ‘기’는 리(理)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유교(성리학)는 ‘리’를 중시하므로 유교가 최고라는 것이다. 사실 이런 억지가 없다.

하지만 정도전은 이런 매도와 왜곡을 통해 당시 사상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졌던 불교를 제압하고 신진세력의 진보적 사상이었던 성리학을 국가의 이데올로기로 자리잡게 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이는 현실의 권력을 등에 업고 한 일이었기에 가능했다.

그의 철학사상은 이처럼 이론 그 자체로 보면 왜곡과 편견과 오류로 가득 차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새로운 국가의 정신적 기틀을 마련한다는 분명한 현실적 목적을 가지고 철저히 실천과 결합되면서 진행된 것이었던 만큼, 그의 실천을 함께 고려하지 않으면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는 학자이자 혁명가이자 정치가였고 그의 철학은 이 모든 역할이 결합됨으로써 완성된 것이었다.

김형찬기자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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