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찬의 문화비평]"좋은 책 만든다면 망해도 여한없다"

  • 입력 2001년 1월 3일 18시 46분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The Feynman Lectures on Physics)’. 자연과학도라면 대학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들춰 봤을 세계 과학도의 필독서다. 1963∼1965년에 출간된 이 세 권짜리 책은 아직 한글번역본이 없다.

◇"한 줄의 문장이 삶을 바꾼다"

자연과학 분야는 1990년대 들어 세상이 ‘세계화’로 떠들썩하기 전부터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해 왔으니 굳이 한글번역본이 필요없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처음 출판계에 발을 디디면서부터 이 책의 한글판을 내겠다는 야무진 꿈을 키운 사람이 있다.

‘도서출판 승산’의 대표 황승기씨. 강남에서 ‘잘 나가는’ 수학강사로 입시학원을 운영하다 ‘책’을 통해 암기위주의 교육 풍토를 바꾸겠다며 학원 문을 닫고 출판을 시작한 그는 중고교 시절부터 학생들이 이런 책을 읽으면 스스로 생각하고 공부하는 습관을 익힐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지난해 우여곡절 끝에 판권을 확보해 번역을 진행중이다. 이제 원하던 책의 판권을 확보했으니 번역만 잘 해서 펴낸다면 망해도 여한이 없단다.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이라는 기념비적 저작으로 유명한 영국의 역사가 E P 톰슨은 인간을 둘러싼 환경을 인간이 어떻게 경험하고 이에 다시 능동적으로 대응하는지를 추적했다. 노동계급은 단지 영국 산업자본주의의 산물이 아니라 일상의 문화적 환경에 반응하며 스스로 자신의 계급을 형성해 간 의식적 행위자였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문화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져 가는 이유는 단지 이 사회에 문화현상이 만연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일상의 곳곳에 스며 있는 ‘문화’를 어떻게 소비하고 다시 생산하느냐에 따라 세상이 달라진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회의 변화는 정치적 경제적 변혁을 통해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단 한 줄의 문장이나 단 한 컷의 장면이 한 인간의 삶을 바꾸고 사회를 변화시킨다.

책은 여전히 정보 전달의 효율적 수단이고, 따라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문화적 힘을 가지고 있다. 책을 통해 전해진 정보는 인식과정에서 인간이 가진 기존의 지식과 관점을 통해 재편집되어 다시 인간의 사고를 변화시키고, 나아가 인간의 삶과 사회를 바꿔 놓는다.

◇거창한 구호대신 작은 실천

책으로 한국의 열악한 교육풍토를 바꾸겠다는 한 사람의 시도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둘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일상 안에서 잘못된 환경이 감지됐다면 이를 변화시키려는 일상의 실천을 시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문화’는 이런 잘못된 환경이 지속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장소일 수도 있고, 이를 극복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 삶의 현장일 수도 있다.

양서가 살아남기 어려운 대한민국의 열악한 출판시장에서 ‘좋은 책’을 계속 펴내기 위해 황대표는 다시 학원을 운영해 자금을 조달할 작정이란다. 거창하게 지식정보사회를 외치는 정부가 방관하는 사이에 곳곳에서 세상을 바꾸려 애쓰는 사람들의 모습이 힘겨워 보인다.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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