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세상읽기]장기수 송환은 北 이기는 길

  • 입력 1999년 3월 1일 20시 04분


감옥 체험을 해본 사람이라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타의에 의한 격리(隔離)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교도소 문을 나서는 세계 최장기수 우용각씨의 표정은 밝았다. 하지만 거기에는 가족을 북에 둔 채 남의 감옥에서 한 발짝도 자유롭게 내딛지 못하고 산 41년 세월의 한과 아픔이 실려 있다.

우씨를 포함한 20여명의 비정규군 출신 전쟁포로와 남파간첩들이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어디서 어떻게 마무리할 수 있을까.

북한 정부가 국군포로나 납북어부와 맞교환에 응한다면 혈육을 다시 껴안아 보고 손자들의 큰절을 받을 수도 있다.

북한이 국군포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종전의 입장을 수정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 정부는 미전향 장기수 북송 문제를 남북 이산가족 재회 사업과 연계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고 한다. 좋은 생각이다. 그렇지만 북한이 여기에 응하리라는 보장은 역시 없다.

한국 정부나 국민의 바람과는 동떨어지게 막무가내로 무조건 송환을 요구하는 북한의 처사가 잘못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불확실성과 불가측성을 외교전의 유일한 무기로 사용해 온 북한 정부가 ‘공화국 인민’ 스무 명의 여생을 위해 하루아침에 자세를 고쳐 무언가 상호주의에 입각한 확실한 대가를 내놓으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무슨 계획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진행된 사태를 보면 정부는 스스로 진퇴양난의 골짜기로 뛰어든 셈이다. 상호주의 원칙을 지키느라 송환을 거절하면 금강산 관광을 계기로 어렵사리 조성된 대화 분위기가 깨질지도 모른다. 무조건 북송을 하다가는 햇볕정책이 ‘친북정책’이나 ‘국가안보의 포기’로 매도당할 판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발상의 전환이다. 미전향 장기수는 쌀이나 비료가 아닌 살아 있는 인간이다. 인생을 통째로 감옥에서 보낸 그들의 마음 속에는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에 대한 충성심이 철옹성처럼 남아 있다 할지라도 그들이 대한민국의 기본질서를 위협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들은 남의 도움 없이는 평범한 일상생활조차 꾸리지 못할 만큼 병약하고 혈육과 고향산천을 껴안아 보는 것을 마지막 소원으로 간직하고 사는 노인들일 뿐이다. 이인모씨 송환 때처럼 북한 정부가 그들을 정치선전에 이용한다 할지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내부 선전용에 불과하다.

문제의 핵심은 이 노인들의 마지막 소원을 이루어 주느냐 마느냐는 것이다. 만약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 스스로 판단하기에 옳은 일이라면 남한의 수많은 이산가족의 똑같이 절절한 소망을 북한 정부가 냉혹하게 외면하더라도 그래도 송환하는 것이 옳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상대방의 잘못을 이유로 들어 자기의 똑같은 잘못을 정당화하는 냉전적 사고틀에 갇혀 살았다. 이것을 과감히 벗어 던질 수 있는 능력, 이것이 바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능가하는 대한민국의 힘이 아닐까.

유시민(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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